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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짐작(斟酌)

 

01

도회지 번화가에는 가을이 안 보이듯 숨어서 오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해거름 빌딩가 가로수 가지 그늘로 비쳐드는 가을 표정과 설핏 마주친다. 바뀌는 계절의 풍경 앞에 서면, 누구든 ‘돌아보고 있는 자아’를 발견하리라. 계절이 지나가는 길목, 누구나 시인 윤동주의 마음이 되어, 잠시 자기를 멈추고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생에 대해서 좀 고상해도 좋고, 좀 비감해도 좋고, 얼마간 고즈넉한 응시가 있어도 좋으리라. 자아와 세계, 그리고 존재와 시간을 헤아리며, 내 정신의 허기를 깨달아도 좋으리라.

 

그런 기분에 놓이던 날, 나는 신촌의 그림 전시회에 간다. 금릉(金陵) 김현철(金賢哲) 화백의 전시장이다. 이번 전시의 주제 타이틀은 ‘짐작(斟酌)’이란다. “우리는 초승달을 보고도 만월을 그릴 수 있다”라고 말한 문태준 시인의 말에서 김 화백이 얻은 회화적 발상을 얻어 ‘짐작’이라는 주제로 그림들을 모아 놓았다. 내가 이 ‘짐작’의 전시에 울림 있는 공감으로 다가간 것은, 문태준 시인의 아포리즘(aphorism)에 이끌린 바가 컸다. 문 시인의 아포리즘은 이러하다.

 

“좋은 작품은 다 말하지 않는다. 짐작의 공간을 넉넉하게 남겨 두는 데에 아름다움(美)이 있다.” ‘짐작’이 ‘여백의 공간’과 상통함을 일러주는 말이다. 작품 하나를 소개한다.

 

서귀포 앞바다 ‘범섬’이며, 울릉도 해안이며, 영월 청령포며, 김 화백이 그려낸 형상들은 여백의 미학을 쟁여 두고 있다. 그 여백으로 인하여 나는 ‘짐작의 사유(思惟)’에 든다. 여백은 형상의 바깥에만 있지 않다. 형상의 내부에서도 잘 연출되어 있다. 가령 그가 그린 바다는 화면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얼마나 넉넉한 비움을 던져오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바다를 처음 대면하는 듯하다. 그가 그려놓은 하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자유롭게 짐작한다. 섬과 바다가 저렇듯 단순해져서 무슨 이데아처럼 추상화되는구나. 저렇듯 넉넉하게 비워놓는 방식의 사실(寫實)은 ‘실제의 사실(寫實)’을 기묘하게 초월하는구나. 범섬이 갈라놓는 하늘과 바다의 선을 보며, 나는 구분의 의미 없음을 짐작해 보기도 한다.

 

김 화백이 추구하는 자연 진경 안의 한량없는 여백은 나를 짐작으로 이끌어서, 나만의 의미의 심연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보이는 영역’으로 끌어올리게 한다. 그래서 짐작은 헤아림의 미학이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헤아려 느끼게 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림 앞에서 이런저런 ‘짐작’에 든다. 내 초월의 사유(思惟)가 동력을 얻고, 마침내 ‘미적 즐거움’에 도달한다.

 

02

사실 나는 ‘짐작(斟酌)’이란 말과 관련해서 오늘 전시장에서와 같은 심미적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다. ‘짐작(斟酌)’이란 말을 늘 대하면서도, 이 말에 대하여 언어 의미론적 사색을 해 본 적도 없다. 그저 이 말을 일상의 대화에서 기능적으로 틀리지 않고 사용해 오고 있을 뿐이다. 명색이 국어교육학자이면서 말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력의 맥락을 풍성하게 거두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김현철 화백의 전시회와 그 주제가 오늘 보여 준 ‘짐작’의 경지는 참으로 오묘했다. 나는 비로소 ‘짐작’을 새로 배운 것이다.

 

원래 ‘짐작(斟酌)’의 ‘짐(斟)’이 ‘술 따를 짐’이고, ‘짐작(斟酌)’의 ‘작(酌)’도 ‘술 따를 작’이다. ‘짐작(斟酌)’은 순전히 술 따르는 행위에서 생겨난 말이다. 남의 잔에 술을 따를 때, 많은 것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잔의 크기도 헤아려야 하고, 따를 술의 양도 헤아려야 한다. 술 따르는 속도도 헤아려야 한다. 그 이전에 상대가 지금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지도 헤아려야 한다. 한창 마시는 중이라면 얼마나 취해 있는지를 헤아리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이 모두 ‘짐작’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를 헤아리지 못하면 즉, 짐작하지 않고 따르면, 술잔은 넘쳐 쏟아지고, 술자리는 파흥으로 치닫는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짐작’은 상대를 간파하려는 단순한 추리적 기능을 넘어선다. 그러니까 ‘짐작’에는 상대를 배려하려는 어떤 도덕적 덕성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뿐 아니다. 신중함의 태도도 스며있고, 처지를 바꾸어 상대를 이해하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도 숨어 있다.

 

그것은 상당 수준의 ‘공감(empathy)’ 역량에 연결되는 자질이라 할 수 있다. 김 화백의 작품 전시 주제가 ‘짐작’인 것은, 결국 작품에 대한 공감의 고양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특별히 ‘여백 지향의 그림’들을 창의적으로 기획한 것이리라.

 

돌이켜 보니, 우리는 이 ‘짐작’이라는 말을, 덕성의 자질이 끼어들 여지조차 없는 말로 사용해 왔다. 예를 들어보자. “뭐 짐작 가는 것 없어?” 이때의 ‘짐작’은 그저 단순한 추리이다. “그 녀석 짓이라고는 짐작도 못 했어.” 이때의 ‘짐작’은 그저 의심한다는 뜻 정도이다. “짐작하건대, 끝까지 시인하지 않을 거야.” 이때의 ‘짐작’은 그저 상대에 대한 고정관념의 확인일 뿐이다. 좋지 않은 맥락에서만 ‘짐작’을 써 온 것이다.

 

요컨대 ‘짐작’은 신중과 배려와 공감 등, 도덕적 사고를 불러올 수 있다. 짐작은 원래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헤아림이다. 그러나 요즘은 자기중심의 짐작이 많다. 아니 이런 쪽으로만 ‘짐작’은 진화되어 온 듯도 하다. 이기적 짐작은 ‘지레짐작’을 불러온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넘겨짚어 어림잡아 헤아리는 것’이 지레짐작이다.

 

달리 말하면 ‘나 중심의 생각’에 빠져서 일방적으로 상대를 계산해 보며 헤아리는 행동이다. 자기 이익에 매우 민감하고,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심리가 지레짐작을 부른다.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진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 북한에서는 이를 ‘건짐작(乾斟酌)’이라고 한다. 윤기 없는 메마른 짐작이란 뜻이다.

 

03

말은 변한다. 말의 뜻도 변하고, 말의 형태도 변한다. 그 말이 함의하는 가치가 달라지기도 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개새끼’는 욕이 아니었다고 한다.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닌, 그야말로 가치중립적으로, ‘개의 새끼’를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국제전쟁으로서의 6.25를 겪고, 이 땅에 영어가 상륙하여 ‘son of bitch’라는 욕을 만나면서 우리의 ‘개새끼’도 급격히 상대를 모욕하는 욕의 뜻으로 변이되었다.

 

말이란 변하는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말의 근원을 상고하는 관심도 동시에 필요하다. 말이 시간 따라 변하는데, 그 근원 의미를 아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그저 알아듣고 사용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 이런 인식은 실제로 쓰이는 말의 기능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말이 실제로 쓰이는, 그 기능적(機能的) 의미에 주목하여 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니 가령 ‘짐작’이란 말의 속뜻과 의미작용은 이러저러했다고 살피는 일은 바쁜 세상에 맥 빠지는 일이 될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말의 예전 뜻을 상고하고 재음미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인문학적으로 좀 더 깊이 생각해보고자 함에 있을 것이다. 말의 의미와 가치를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확충하는 자리에서 말살이의 깊은 맛이 우러나고, 인간 삶의 본질과 사람됨의 조건에 대한 깨달음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가르치는 교육’은 말 자체에만 꽂히지 말아야 한다. 좀 더 폭넓은 말의 근원 맥락을 경험하게 해야 한다. 인간 삶의 총체와 더불어 언어가 융합적으로 작용하는 장면들을 교육적으로 더욱 중시해야 할 것이다.

 

김 화백의 전시장에서 보니, 국어교육과 미술교육이 따로 있지 않다. 언어를 언어기호로서만 가르치는 편협한 언어교육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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