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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도덕과 행복을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언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론 ②

‘철학이란 행복한 시절에는 아름다운 장식에 불과하나, 불행한 시기에는 피난처가 된다.’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철학에 큰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예전에는 별 관심 두지 않았던 철학자들의 말을 곱씹게 된다. 삶이 늘 만족스럽기를 희망하지만, 멋진 휴양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인스타그램은 환상일 뿐이다. 기술발달이 인간의 욕구를 상당 부분 충족시켰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철학은 지금도 우리에게 유용한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eudaimonia)이란 무엇인가? 정말 중요한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사람들 대부분은 만족 또는 쾌락을 행복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좋은 옷과 가방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월급을 탕진해보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 만족감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옷과 가방은 처음에는 즐겁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진다. 또한 명품 브랜드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쇼핑중독에 빠지거나, 디드로 효과(Diderot effect), 다시 말해 자신이 구매한 명품에 어울리는 것들로 나머지 모든 물건을 싹 바꾸는 소비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혹은 내가 원하는 것들을 성취하면 행복해진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아쉽게도 진학과 취직에서 원하는 목표에 도달해도 기분 좋은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취업을 위해, 성공을 위해 하는 공부는 근본적으로 불행을 예고한다. 누구나 원하는 대학이나 직장을 얻지는 못한다. 내 공부와 노력이 결과를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삶에서 예측할 수 있는 미래가 있을까?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라는 사실만이 분명하다. 공부는 단지 기회일 뿐 그것을 통해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가능성은 객관적으로 높지 않다. 공부를 일종의 도구로 생각하는 순간 공부는 아무런 재미없는 고역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사색을 통해 자아와 세계를 고민하고 만족 대신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노력, 다시 말해 ‘진리 탐구’로 정의되는 이러한 활동은 지속적인 몰입을 통해 차원이 다른 만족감을 제공하게 된다. 삶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으로 평가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행복이라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행동양식과 그것을 규정하는 도덕윤리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다.

 

좋은 습관을 반복하면 좋은 사람이 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제목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들려주는 윤리학에 대한 강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일설이 전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저작에는 <에우데모스 윤리학>, <대 윤리학> 등도 있지만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대표작으로 간주된다.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대체로 인간과 시민이 지향해야 하는 윤리적 삶의 모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정의로운 사람이 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플라톤은 정의(justice)의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로운 행동을 많이 하면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체득해온 우리의 상식으로도 정의로운 행동을 구별하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소한 행동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소소한 것들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던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난해하고 거창한 이데아론 대신 상식과 교양의 차원에서 윤리적 삶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윤리학(ethics)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원래 ‘품성·성격에 관한 논의’라는 의미이다. 이 말과 동일한 어원인 ‘ethos’는 습관을 가리킨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핵심적인 질문은 다양하게 분석할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느냐에 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본성(physis)에 따라, 습관(ethos)에 따라, 또 다른 사람은 직접적인 가르침(didaskaleia)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Ethica Nicomachia, 1179b21). 그런 면에서 교사가 학생을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 역시 재능을 이끌어 내거나, 좋은 습관을 제안하고 반복시키거나, 직접적인 가르침을 제공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겠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교육의 차원에서 습관화를 강조한다.

 

윤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 수 있다면 윤리적 기준은 불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부족한 능력과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과 협력과 공존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모든 공동체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윤리적 행위에 관한 기준과 그에 따른 삶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자연히 훌륭한 인간·탁월한 인간·좋은 시민과 같은 윤리적 개념들이 관습적으로 형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훌륭함을 지적 영역과 성격적 영역의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윤리학에서는 주로 성격적 측면의 훌륭함에 주목하여 시민을 위한 윤리적 생활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방식

그런 면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하는 도덕교육은 플라톤의 <법률>에서 제안하는 교육의 양상과 제법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스승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기뻐해야 할 것을 기뻐하고 괴로워해야 할 것에 고통을 느끼도록 길러져야 한다고 제안한다(Ethica Nicomachia, 1104b12-13). 덕은 쾌락과 고통에 관해 최선의 것들을 행하는 품성상태인 반면, 악덕은 그 반대의 상태라고 가정한다. 여기에서 최선을 추구한다는 의미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는 통상적인 의미는 아니다. 쾌락과 고통을 적절하게 승화시켜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지향한다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방식을 압축하는 표현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을 제안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어떤 삶의 모습이 중용이냐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면서도 심오하다.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은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을 훌륭함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방식’이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를테면 용기는 두려움과 대담함 사이의 중용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양극단에서 대체로 중간에 위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은 ‘이성을 통해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그런 면에서 중용을 얻기 위해서는 도덕에 대한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태도를 모두 겸비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당연히 모든 일에 중용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불법행위와 범죄에 대해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옹호하는 것은 불법에 동조하는 행동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중용은 기계적인 중립이거나 두 극단의 중간과 같은 산술평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누가 보더라도 부당한 범죄행위는 중용 대신 시시비비를 가리는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두려움과 대담함과 관련해서는 ‘용기’가 중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돈에 관해서도 마땅히 주어야 할 사람에게, 마땅한 만큼, 마땅한 때에, 마땅한 목적을 위해, 그리고 마땅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자에게는 너그러운 태도가 돈에 관한 중용에 해당한다.

 

학교는 행복한 공간이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론과 행복론을 오늘날의 학교 교육 측면에서 검토해보면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 학교는 행복한 공간이 될 수 있는가. 사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관점에서 행복한 공간이냐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학교 구성원들이 느끼는 만족감이 아닌 그들이 매진하는 활동과 관련된다.

 

이는 교사와 학생이 도덕적 훌륭함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고 지속적인 자기성찰과 수행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에 가깝다. 특정 외부요인의 개선이나 환경의 변화를 통해 교육수요자의 요구(needs)를 충분히 수용하고 반영하는 것으로 근본적인 행복의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는 아이들은 아직 행복한 삶을 충분히 실천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습관을 통해 훌륭하게 성장할 것을 제안한다(Ethica Nicomachia, 1095b6).

 

일상생활 속 행동방식으로 작동하는 습관은 일종의 버릇과 같은 것이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habitus) 즉, 특정 계층이 가지고 있는 집단적인 문화적 유사성과 같은 정서는 사실상 버릇(habit)이 집단적 차원에서 고착화된 것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윤리(ethos)란 개인의 습관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제안한다. 일부 자기계발서가 정리정돈을 강조하고, <소학>의 예절교육방식으로 청소가 있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습관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인간의 성향(hexis)은 그 성향과 유사한 활동들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들인 습관은 매우 큰 차이를 만들게 된다.

 

전통적으로 학교가 담당해왔던 훈육 기능이 쇠퇴하면서 오늘날 일선 학교의 도덕교육은 많은 변화를 맞고 있다. 행복은 분명 그 자체로써 선택되는 활동이어야 하며, 탁월성을 지향하는 활동이 바로 행복을 위한 활동이다(Ethica Nicomachia, 1176b1). 그리고 행복한 삶은 중용을 지키는 도덕적인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 행복의 길은 세속적 욕망을 위해 매진하는 공부가 아닌 삶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공부에 있음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안한다.

 

학생들의 흥미와 동기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교육현장이지만 좋은 습관에 대한 강조는 중용의 차원에서 한 번쯤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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