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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별들의 언덕 - 제4화 이야기하는 인간

소설로 풀어보는 교사를 위한 인문학

'레트로(Retro)'에 주목하는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디지털 환경에 지친 현대인들이 아날로그 감성을 찾고 있다. 다시, 인문학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작은 동네 서점들에서 인문학 도서가 인기를 끈다. 아마도 인간만이 지닌 ‘온기’를 다시금 느끼고 싶은 까닭일 듯하다.

교육현장에서 오랫동안 인문학 발전에 힘을 쏟아온 우한용 서울대 명예교수가 교육현장의 감각을 살려 인문학을 소설로 조명한다. 첫 회는 ‘우주적 존재인 인간’의 의미를 추구했고, 제2화 접촉하는 인간, 제3화 희망하는 인간을 주제로 엮어냈다. 이번 호는 이야기하는 인간을 주제로 흥미있게 풀어냈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내 존재를 인문학적으로 성찰하는 소설을 만나보자. <편집자>

 

태안고등학교 박민경 선생이 조부상을 당했다. 박민경 선생은 태안군 혁신학교 추진을 맡고 있어서 이웃 학교 선생들과 다양한 교분을 가지고 지냈다. 특히 이인문 교감선생과는 사제간이기도 했다. 박민경 선생은 신천강 선생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교사들 사이에 문상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가벼운 논란이 있었다.

 

“아버지라면 몰라도, 할아버지면 아버지의 아버지인데 우리와는 거리가 있잖나?”

“문상을 어디 죽은 사람 위해 간답디여, 산사람 위로하러 가는 거지....”

“문상을 한다고 위로가 될까, 죽음은 근원적으로 위로하고 위로받고 할 성질이 아닌 거여....”

 

우리가 애도의 형식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렇지, 아무리 근원적이라도, 아니 근원적이면 근원적일수록 위로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닌가, 신천강 선생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간 애경사에 서로 연락하고 지내는 이들만 함께 참여하기로 했다. 그런데 교감선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는 의견이 달랐다. 함께 가자는 이들과 따로 알아서 가게 하자는 편으로 의견이 갈렸다. 그런데 차편이 마당칠 않았다.

 

교감선생은 잠시 무얼 생각하는 듯 서 있다가, 박창덕 선생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박 선생은 본래 술을 않던가? 운전은 하지?” 박창덕 선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교감선생이 새로 구입한 SUV ‘알바트로스’에 같이 타고 초상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차는 이름처럼 날아갈 듯 매끄럽게 달렸다.

문상 온 선생들은 향을 피우고 제단에 꽃을 바쳤다. 몇은 서서 묵례를 하고, 교감선생을 비롯한 몇은 재배에 반절을 올렸다.

 

“가슴 아프시겠소. 그래 조부께서 가시는 길에 고생은 안 하셨는지?” 교감선생은 손을 모아 공수한 자세로 조용히 목청을 낮추어 말했다.

“식구들 다 둘러보시고 나서는, 주무시려는 것처럼 조용히 눈을 감으셨어요.” 박민경 선생이 말했다.

“오복 가운데 고종명을 하셨으니 복인이오.” 교감선생이 낯선 어투로 말을 받았다.

 

신천강 선생은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음미라기보다는 교감선생이 말한 ‘고종명(考終命)’이 너무 고투이기는 하지만, 말하자면 천명을 다 산 생애의 끝이 좋다는 뜻으로 새겨들었다.

 

 

“몇 수를 하셨나?” 교감선생이 물었다.

“팔십오세를 사셨어요.” 박민경 선생은 아쉽다는 듯 멈칫거리고 서 있었다.

“팔십오세라, 개띠시구먼....” 교감선생이 실눈을 뜨고 손가락을 짚어나갔다.

“교감선생님, 말하자면 그게 육갑하시는 거지요?” 신청강 선생이 깔깔 웃으면서 교감선생을 올려다보았다.

 

“육갑? 그렇지요. 음양오행이 거기 들어있는 것이니까, 동양철학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천간지지, 거기에 하늘과 땅의 이치가 다 들어 있어요. 사람은 땅에 사는 존재니까 지상의 동물과 대응되는 간지를 타고난다고 보는 거고. 말하자면, 박민경 선생의 조부는 개띠인데, 개는 충성스런 동물이지. 충견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헌데 그 연세면 군대에 갈 여건은 아닌데... 어떻게 충성스런 일을 하셨나?”

 

교감선생이 박민경 선생에게 이야기를 해보라는 표정으로 앉아 있을 때, 신천강 선생은 ‘주구, 충견’ 그런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서 절대선과 절대악을 고정된 개념으로 설정하기 어렵다던 윤리학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토사구팽’ 그 고사성어가 그러한 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냥을 나갔다가 토끼를 잡을 때까지는 사냥개를 부려먹었는데, 토끼를 잡고나니 사냥개가 필요없어 삶아먹는다는 이야기는 한고조 유방과 그의 충신 한신 사이에 충성과 배반을 상징하는 고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상황윤리를 인정하면서도 윤리의 절대성에 대한 신념 혹은 이념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교수는 ‘자네들이 가르치는 자리에 섰을 때 공부하던 기억을 가끔 상기하란 말씀이야.’ 진중하게 이야기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격언을 들추면서였다.

 

“우리는 개구리가 아니거든요!” 신천강이 그렇게 응대하는 바람에 학생들이 낄낄대고 웃었다. 신천강은 생각이 너무 멀리 튄다 싶어, 자세를 가다듬고 교감선생에게 물었다.

 

“박 선생 조부께서 어떻게 충성스런 삶을 사셨는지, 교감선생님은 혹시 아세요?”

“하긴 그렇군. 6.25 때 열다섯 소년이었는데.... 그러면 4.19세대에 해당하는 연령댄데...” 문상객 없으면 박민경 선생더러 잠시 만나잔다고 얘기하라면서, 교감선생은 소주잔을 채워주고는 이야길 시작했다.

 

“자연시간 팔십오 년이면, 거의 백년인 데, 그거 대단한 거요. 문제는 자연시간 속에는 이야기가 없다는 거겠지요. 시간에 이야기가 입혀져야 역사가 되는 겁니다. 역사화된 시간이라야 해석의 가능성, 가치평가의 가능성이 생겨요. 우리 이야길 하자면, 교사로 삼십년 산 사람과 조폭으로 그만큼 산 사람은 이야기가 애초에 달라요.” 교감선생은 소주잔을 비우고는 신천강 선생에게 잔을 내밀었다. 신천강 선생이 아무 말 없이 잔을 채웠다.

 

“박 선생 조부 같은 분은 이야기가 길기도 하겠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열 살에 해방을 맞고, 열다섯에 6.25 나고, 그리고 스무살에 4.19 혁명, 이듬해 5.16 군사정변, 군사정권 지나서, 88 올림픽 때 그 양반이 오십대 중반,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점만 하더라도 그양반 삶의 가치가 있는 거겠지.” 노인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기만 해도 집안의 믿음이라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떴을 때 할머니는 그런 이야길 했다. 병수발을 하느라고 허리가 휘어졌지만, 먼저 떠나간 남편을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신천강 선생은 꼭 그럴까,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젊은 사람 피곤하게 하는 노인들이 쌔이고 쌔인 거 아닌가....

 

“좌우간 오래 살고봐야, 이야기가 만들어져요.” 교감선생은 자신의 이야기론을 마무리하듯 그렇게 말했다. 신천강 선생이 나섰다.

 

“꼭 그럴까요? 백 년 산 사람의 이야기 값이 오십 년 산 사람의 이야기 값의 배가 된다는 논리는 무리인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살았어도 항일을 한 것과 친일을 한 것이 같은 값으로 평가될 수 없을 건 당연하고요. 그리고 이야기의 밀도랄까 이야기의 강도 같은 것도 고려해야 될 테고요. 항일을 했다면 목숨걸고 했는지 그저 시늉으로만 했는지했는지... 그런데 그 이야기는 누가 값을 결정해 주지요?” 교감선생이 난감한 표정으로 종이잔을 뱅뱅 돌리고 있을 때 박민경 선생이 상복으로 갈아입고 왔다. 까만 치마저고리에 머리에는 하얀 나비 매듭을 달고 있었다. 평소 나락나락한 몸매와는 달리 설명하기 어려운 위엄이 서려 보였다. 그러나 얼굴에는 피곤한 기운이 역력했다.

 

“거 뮈시냐,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 군대 이야기는 안 하시던가?” 교감선생이 물었다.

“할아버지께서는 군대는 안 가셨어요. 대신 학도의용군에 나가셨다고 해요. 다부동 전투 이야기를 자주 하셨는데요. 조지훈 시인의 ‘다부원에서’라는 시를 손수 써서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놓고 읊곤 하셨는데, 옆에서 보면 그 시를 읽을 때 눈자위가 젖어들곤 했어요.” 박민경 선생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그럼 국가유공자셨겠군.” 교감선생이 그렇게 받았다.

 

“맞아요. 언제던가 훈장을 받으셨는데, 그 훈장을 방바닥에 던져놓고는, 통일이 아득한데 이딴 훈장이 뭔 소용이야, 화를 돋구시던 기억이 나요. 할아버진 왼팔을 거의 못 쓰셨어요.” 박민경 선생이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주물렀다.

“저런, 어쩌다가?” 교감선생이 쯧쯧 혀를 찼다.

 

“왼쪽 견갑골 아래, 흉곽 뼈 어딘가 총탄이 박혔는데 하도 깊어서 그걸 빼낼 수 없어서, 평생 통증에 시달리며 지내셨어요. 그래서 결혼도 늦어지셨대요. 할아버지 윤기나는 생애는 학도의용군에 나가셨던 걸로 끝났는지도 몰라요.” 평생 무얼 하며 지냈는지 묻기는 사뭇 망설여졌다. 생애 이야기가 일그러졌다는 건데, 그 디테일을 듣고 싶다는 것은 일종의 가학취미로 비칠지도 몰랐다. 그러나 디테일 없는 이야기는 추상적이라서 실감이 적었다.

 

“어떤 사람의 한 생애를 몇 가닥 이야기로 정리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지요.” 교감선생이 이야기하는 맥락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오지 않았다.

 

“이야기는 생애에 완결성을 부여하지요. 레퀴엠이라는 음악, 레퀴엠이란 말은 안식이라는 뜻인데, 죽은 사람이 저승세계에서 안식을 취하라는 뜻이지 않겠어요? 저승세계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세계,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세계라고 할까. 그런 세계가 필요한 까닭은 곤고한 이승의 간난을 그대로 떠안고 죽음의 세계로 간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겠어. 그 원한을 풀고 안식하자면 저승세계를 만들어야 하겠지. 그래서 종교마다 내세를 이야기하는 거고. 불교처럼 전생과 이생과 다음 세상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승에서 짓는 업에 따라 어떤 존재로 환생되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존재의 상승을 도모하는 일종의 서사전략일지도 모르는 일이라오.” 교감선생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조짐이었다. 신천강 선생이 말머리를 거머잡았다.

 

“박 선생 할아버님이 개띠라면, 저승에도 개가 되어 간다는 뜻인가요?”

“저런, 불교와 유교는 상징체계가 달라요. 이야기는 문화적 상징체계에 따라 내용이 달라집니다.” 하기는 상징이 의미의 극단적 대립성을 지닌다는 점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교감선생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교감선생은 박민경 선생에게 다부동 전투에 대해 할아버지한테 직접 들은 적이 있는가 물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참 간도 크세요. 열다섯 살 중학생이, 학도의용군으로 나간다는 게 말이 돼요? 아무튼 다부동 전투에 참여하신 게 할아버지 생애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어요. 권투선수가 꿈이었는데, 전투 중에 당한 부상으로 꿈을 접어야 했고, 그 때 소대장의 여동생이 할머니가 되었대요. 그런데 그 소대장이 적군에게 생포되는 바람에....?” 그래서 빨갱이 누명을 쓰고 요시찰인물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박민경 선생은 슬그머니 소주잔을 교감선생 앞에 내밀었다. 갈증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교감선생은 박민경 선생에게 소주를 따라주고, 결론을 내리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야기는 시공간적으로 중첩교차하면서 짜여나갑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행위는 모두가 남과 관계를 맺으며 하게 마련입니다.” 꼭 그럴까, 신천강 선생은 머릿속에 의문부를 그리고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성서에 그렇게 나오는데, 영어로 단어를 뜻하는 워-드는 그 자체가 단독자인 것처럼 되어 있거든요.... 맥락도 주체도 없어요.” 조문 와서 하는 이야기 치고는 자리와는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선생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교감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교감선생과 신천강 선생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는 셈이 되었다.

 

“단어 자체로는 언어수행을 할 수 없어요. 맥락이 부여되고 언어행위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상호작용이 있어야 언어수행이 가능해집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러니까 그 워-드라는 단어에 아예 이야기라는 뜻이 들어 있어요. 그리고 동사로도 쓰이니까, 그 단어는 이야기한다는 뜻도 자연스럽게 포함하지요. 그러니까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게 바꿔 읽어도 되는 거 아닐까, 그렇습니다.” 알았다는 듯이 신천강 선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시계가 걸린 옆쪽 벽을 쳐다봤다. 일행이 일어나자 박민경 선생이 어른들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교감선생이 다시 손을 저어 아니라고 만류했다.

 

“상주 함부로 부르는 거 아니요. 아버지 어머니 잘 위로해 드리시구... 우린 이쯤서 일어납니다. 초상집에서는 배웅 안 나오는 법이니 그대로 계셔.” 일행에게 인사를 하는 박민경 선생의 얼굴이 어느 사이 붉어져 있었다.

 

“교감 선생님, 다부동 전투에서 희생된 분들 이야기는 누가 기록하지요?” 신천강 선생이 물었다. 교감선생이 크음, 하품을 걷어들이면서 말했다.

 

“시인과 작가들의 몫이 그런 거지 않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다부동 전투를 기억하고 다시 이야기할 수 있도록 틀거리를 만들어주는 게 글쓰는 사람들의 몫이지요.” 신천강 선생은, 돌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제사는 필요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애도의 한 형식이 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민경 선생 댁에서 추도식이라도 한다면, 조지훈의 시 ‘다부원에서’를 한번 낭송해 주겠다는 생각을 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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