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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빈자(貧者)들을 위한 헌신과 사랑으로, ‘성녀(聖女)’라는 칭호를 들으며, 세계인 모두를 경건하게 감복시켰던 마더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 1910~1997)를 우리는 기억한다. 세상은 그녀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 했지만, 그녀가 노벨상 때문에 우리에게 감명을 준 것은 아니었다. 인류 전체를 ‘사랑의 공동체’로 여기고 섬긴 그녀의 실천에 대한 외경을 갖기 때문이리라. 마더 테레사가 1992년에 쓴 책, <The Joy of Living>에는 다음과 같은 그녀의 체험담이 나온다. 인도 콜카타(Kolkata), 극빈의 사람들을 위해서 사랑으로 헌신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한 늙은 촌장이 나에게 찾아와, 자기가 사는 마을에 여덟 아이가 딸린 집이 있는데, 그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 뭔가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그날 밤 내가 겪었던 일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이야기를 듣고 나는 쌀을 좀 챙겨 그 집으로 갔다. 그 집 엄마는 내 손에서 쌀을 받아, 그것을 둘로 나눈 다음, 밖으로 나갔다. 나는 배고픈 기색이 역력한 어린 자녀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의 엄마가 돌아오자, 나는 어디 갔다 왔는지 물어보았다. 아이들 엄마는 아주 짧게 대답했다. “그들도 배가 고파요.” 아이들 엄마가 말하는 ‘그들’은 이웃집 식구였으며, 엄마는 이웃집 식구들도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이웃에게 쌀을 주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 이웃도 배가 고픔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나는 차마 이 가족이 얼마나 오랫동안 굶주렸는지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필시 오래 굶주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엄마는 자신이 고통을 겪는 중에도, 극심한 굶주림으로 고통을 겪는 중에도 이웃집 역시 굶주린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더 테레사 체험담을 소개한 신학자 케네스 베일리(Kenneth E. Bailey)는 이 대목에서 예수가 가르쳐 준 기도 즉, 기독교인들이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주기도문’의 한 구절을 사람들에게 제시한다. 바로 이 구절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나 또한 이 주기도문 구절을 얼마나 많이 외우며 기도드렸던가. 그랬던 만큼이나 일종의 상투적 표현으로 자동화되어 외우기만 할 뿐, 내 안에서 아무런 각성이 없었다. 그냥 매일의 양식(Daily Bread)을 주기를 바라는 기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케네스 베일리는 이 기도문의 구절이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가 아니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점을 주목할 것을 강조한다. 인도 콜카타 빈민촌에서 여덟 명의 자녀와 함께 오랜 굶주림에 지쳐 있던 엄마는 알고 있었다. 그 엄마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 들어 있는 나눔의 의미를 참으로 정확하고도 경건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마더 테레사도 이 엄마의 행동을 보고서 무어라고 말했는가. “나는 그날 밤 내가 겪었던 일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굶주림과 절대 궁핍의 한가운데서도 나에게 전해진 ‘나의 양식’을 ‘우리의 양식’으로 나누어 실천하는 그 엄마의 행동은 마더 테레사에게도 너무도 귀하고 신실한 사랑의 감화로 다가갔음이 틀림없다.

 

02

도덕교육의 원로 학자인 문용린 교수는 일찍이 ‘정·약·용·책·배·소’라는 명칭으로 여섯 가지 도덕적 지혜를 강조하였다. 정직·약속·용서·책임·배려·소유 등 이 여섯 가지 덕목을 잘 익혀서 기르면, 삶을 도덕적으로 더욱 성숙하고 뜻 있게 영위할 수 있음을 말한다. 문용린 교수는 어떤 특강에서 이 중 ‘배려’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매우 의미 있는 성찰을 청중에게 요청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한국 사람들은 배려의 마음이 강한 편인가, 그렇지 못한 편인가를 그가 청중에게 질문하는 데서 시작한다. 나를 포함한 청중들은 이 질문이 약간은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배려심이 강하다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근거가 약한 것 같고, 없다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청중들이 그런 미묘한 심리를 겪는 중에 문 교수는 답을 제시한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제 생각으로는 우리 한국 사람들만큼 배려심이 강한 민족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국민 소득이 3만 달러에 도달하면서도, 아직도 국내 고아들을 배려심 가지고 돌보지 못해서, 해외 입양시키는 사례가 유독 많은 나라, 사회적 기부가 선진국에 비해서 적다는 지적을 받는 나라 아닌가.

 

문 교수는 무엇을 근거로 한국인이 배려심이 강하다는 것을 천명한 것일까. 그는 곧바로 이유를 밝혔다. 나를 비롯한 청중들은 그의 이어지는 말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한국 사람의 배려심은 강합니다. 다만 언제나 누구에게나 배려심이 강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대상에게만 강합니다. 자신의 문중(門中) 사람에 대해서, 자신의 고향 사람에 대해서, 자신의 동문에 대해서, 자신과 같은 정파에 속하는 사람에 대해서, 유독 배려심이 강합니다. 그냥 강한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강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배려심 자체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한국인은 배려심이 강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가 한국 사람은 배려심이 강하다고 말한 것은 하나의 역설(逆說)이었다. 청중들에게 전달 효과를 얻기 위해서 일종의 아이러니(irony)를 구사한 것이었다. 아이러니란 그 안에 묘한 풍자를 담고 있어서, 은연중에 비판이 작동하는 표현법이다. 나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간 내가 내었던 기부금들은(얼마 되지 않지만) 대개는 내 울타리 안쪽 즉, 고향·모교·직장 등에 대한 배려에 속하는 것이었다. 물론 고향과 모교와 문중 등을 배려하는 것 자체를, 흠잡을 일은 아니다.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배려도 있다는 데에 눈을 뜨라는 것 아니겠는가.

 

자선과 기부도 다 ‘이기적 유전자’의 작동이라는 주장도 있다. 인간의 모든 이타적 행위의 기저에는 이기적 동인, 예컨대 자존감이나 인정 등의 만족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무의식 기제라 할 수 있다. 이것으로써 ‘나 중심의 울타리 안쪽’을 먼저 배려하는 것을 옹호하는 논리로 삼기에는 무언가 모자라다.

 

나는 나를 돌이켜 본다. 나의 배려는 ‘나 중심의 울타리’를 먼저 살피는 것과는 상관없는, 인류애 차원의 것인가.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렵다. 인류애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나를 비추어 보았다. 나의 배려 행위는 세계 시민성의 자질을 지니고 있는가. 역시 자신이 없다. 나의 ‘우리’는 어디까지인가.

 

03

‘우리’라는 말의 어원은 ‘울타리’의 ‘울’에서 온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유창돈, <親族稱語의 어원적 고찰>, 1954). 짐승을 가두어 두는 울타리를 ‘짐승 우리’라고 부르는 것에서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돼지우리’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니까, 울타리를 친 안쪽 범주를 뜻하는 말에서 ‘우리’가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원은 그렇다 하고, ‘국어사전에 등재된 우리’의 뜻은 이러하다. ‘자기와 함께, 자기와 관련되는 여러 사람을 다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 되어 있다. 더 간편하게 정리된 ‘우리’라는 말의 뜻으로는 ‘자기편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 풀이되어 있다. 자기편임을 극명하게 확인하는 말로, “우리가 남이가!”를 들 수 있다. 한국 사람이 유별나게 많이 쓰고 애용하는 대명사가 바로 ‘우리’이다. ‘나의 어머니’ 대신에 ‘우리 어머니’, ‘나의 모교’ 대신에 ‘우리 모교’라 한다. 이런 부분을 서양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집안의 어른이나 직장의 상사가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구성원 ‘아무개’가 있을 때, “우리 아무개”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나라 우리말에서나 있을 법한 용법이다.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쓸수록 인식의 객관성과 판단의 공정성을 지키기 어렵다. 내 울타리 안쪽에 있는 ‘우리’만을 감싸려는 마음의 경향(Tendency of Mind)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깨닫는다. 아무리 내 울타리 안쪽의 내 편만 보살피려 해도 내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이 방역에 협조하지 않으면, 내 울타리 안의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다. 내 울타리 밖의 사람들도 내 울타리 안의 사람들이 방역에 협조하지 않으면 위험해질 수 있다. ‘우리 너머의 우리’를 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특별히 고상한 도덕이라 할 것도 없다. 생태 자체가 그렇게 변했다. 정치도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 너머의 우리’도 이제는 ‘우리’인 것이다. 그래서 ‘We are the worl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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