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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복수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의 여정

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아가멤논>의 배경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아내를 버리고 동생의 부인을 구하겠다는 명분으로 트로이 전쟁의 수장이 되었다. 전쟁에 부정적인 신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 사이에서 얻은 맏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고 출정했다. 클뤼타임네스트라로서는 결코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이기스토스와 불륜관계를 맺고 아들 오레스테스를 쫓아냈다. 트로이 전쟁의 승리와 아가멤논의 귀환은 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 복수의 기회였다. 화려한 레드카펫을 깔아 신들을 분노하게 하고, 올가미를 씌워 영웅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남편과 그가 트로이에서 납치해온 첩 카산드라까지 제거했다. 당황한 미케네 원로들의 경고는 말뿐이었고, 미케네 왕국은 그녀와 아이기스토스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제 남은 일은 오레스테스의 복수를 피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복수를 피하지는 못했다. 포키스로 피신한 오레스테스는 복수를 위해 귀환했고, 아버지의 무덤에서 만난 누이와 피난 시절 함께 했던 친구의 도움에 힘입어 어머니와 정부(情夫)를 살해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그리스 신화와 설화의 이야기는 아버지가 딸을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살육의 연속이다. 심봉사가 심청이 앞에서 눈을 뜨는 한국의 설화와 달리 오이디푸스가 죽은 어머니 앞에서 눈을 찌르는 것이 그리스 설화이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익숙한 이야기들이 아니어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의 연속이다. 다만 그것을 마냥 이상한 이야기로 치부하거나 배척할 것은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 되어버린 복수의 결말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 복수로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폭력에 대한 분노가 대를 이어 지속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복수의 싹을 잘라버릴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고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내면에 자리 잡은 상처와 분노를 치유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레스테스는 복수를 천명한다. 가문의 원수인 사촌형제가 어머니와 불륜을 맺고, 아버지를 죽였으니 그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막상 복수가 완성된 후 어머니를 죽였다는 죄책감은 계속 따라다닌다. 칼을 든 아들 앞에서 어머니는 “너는 잠결에도 이 어미의 가슴팍에 매달려 그 부드러운 잇몸으로 달콤한 젖을 빨곤 한다(Choephoroi, 897-898)”며 인정에 호소한다. 오레스테스는 결국 아버지의 이름으로 어머니와 사촌형제를 죽이지만, 그 복수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 되어 오레스테스를 정신착란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레스테스의 복수를 사주한 것은 아폴론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불륜에 아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어머니와 불륜남의 생명을 빼앗을 것까지는 없었다.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분노에 공감했던 시민들이 아가멤논의 죽음에 격분했던 것처럼, 오레스테스의 모친 살해 역시 시민들에게 용서받을 수는 없었다. 사실 오레스테스 본인도 아폴론의 강권과 조언이 아니었으면 의지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클뤼타임네스트라가 애원하던 그 마지막 순간에도 머뭇거렸던 것을 보면 과연 아버지와 가문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명분이 실제 오레스테스의 의도인지 조금 의심스럽다.

 

하지만 모친 살해 이후 오레스테스는 극심한 환청과 착란에 시달린다. 오레스테스의 범죄를 지켜본 복수의 여신들이 오레스테스를 괴롭혔다. 이 난관을 해결할 방법은 얼마 되지 않는다. 여신들의 의도대로 오레스테스가 자살하거나, 그의 행위가 무죄라는 판결을 받아내는 것뿐이다. 오레스테스의 운명은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주도하는 배심원들의 법정에서 결정됐다.

 

오레스테스의 행위를 놓고 격론이 벌어진다. 한쪽에서는 남편과 아내는 혈연관계가 아니니 모친 살해가 남편 살해보다 훨씬 심한 범죄라고 주장한다. 다른 쪽에서는 가문의 원수를 갚았을 뿐이라며 오레스테스를 옹호한다. 누구의 죄가 더 무겁냐를 놓고 시시비비가 벌어지지만, 사실 어떤 결과가 나온들 죽은 자는 살아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의 죄가 더 크건 작건 사실은 큰 의미가 없다. 단지 분명한 것은 복수가 새로운 복수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복수의 여신들은 자랑한다. “집안에서 자란 폭력이 가족 가운데 한 명을 죽이면, 우리는 얼씨구 그자를 뒤쫓는다네. 그자가 아무리 강해도 방금 쏟은 피 때문에 우리는 그자를 없애버린다네.” 여신들은 가공할 힘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복수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에 있다.

 

불편한 감정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문제의 근원

많은 이들에게 학교는 별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는다. 학교에 대해 나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교사가 촌지를 받고 학생을 물리적으로 학대한다고 생각한다. 실제 학교의 변모한 모습이 대중들의 인식에 남아있는 학교는 대략 20년 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경직되고 억압적인 분위기, 복종을 강요하는 학교문화, 차별적인 교사들의 시선, 구별 짓기가 실재하는 교실 공간 등은 많은 사람의 몸 곳곳에 파편처럼 박혀있는 기억들이다. 대학입시 결과에 따라 우열이 결정되는 이 체제는 극소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이 실패자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패감은 더 선명해지고 학부모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불편한 감정을 자녀들이 겪지 않기를 바란다.

 

불편함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지고 깊어진다. 하나는 모든 것에 거침없는 삶을 살아야 할 자녀들을 바라보는 불편함이다. 그 누구도 아이들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고 내 아이는 학교에서 최고의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불편함이다. 이는 그 옛날 내가 힘들었던 인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의 소환이다.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은 모두 은퇴했고 새로운 사람들이 교육에 헌신하고 있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과거 내가 받았던 상처에 대해 충분한 배려를 받지 못했다. 과거 내가 받았던 피해를 이제는 위로받고 싶다.

 

과거에 대한 기억에 공감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과거의 기억은 앞으로 나가야 할 우리를 붙들어 매는 족쇄와도 같다. 과거의 기억에 매몰될수록 사람들의 내면은 더욱 피폐해진다. 그런 면에서 오레스테스와 복수의 여신들은 모두 과거의 기억에 포로로 잡혀있다. 오레스테스는 친누나를 죽인 아버지의 행위를 평가하지 않은 채 오직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고, 복수의 여신들은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불륜과 부정에는 눈감은 채 오레스테스의 징벌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필연적으로 끝없는 폭력을 낳는 ‘복수’

그런 점에서 복수는 필연적으로 끝없는 폭력을 낳는다. 사람들 사이의 파열음은 더욱 커진다. 복수심의 무서움은 상대방을 싫어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과 실수 그 자체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죄가 아니라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된다. 잘못 또한 그 사람이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과 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은 복수의 대물림을 낳게 되는 것이어서 그것 자체로 이미 문제가 된다.

 

복수는 결국 내가 왜 사는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가치관을 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자기 파멸을 가져온다. 내가 잘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망치기 위해 사는 것이다.

 

가슴 속의 분은 좀 풀렸을지 모르겠으나, 그 분풀이는 결국 끝없는 자기혐오의 산물이다. 그 분풀이는 나 자신에게도, 내 아이에게도, 대상인 상대방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부정적인 감정을 투사할 뿐이다. 누구를 위한 삶인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인가. 나 자신을 위한 삶인가. 진정한 나를 보살피는 삶의 자세는 어디에 있는가?

 

교육의 방향이 일관성을 갖지 못하고, 학교는 여론과 유행에 따라 휘둘린다. 교육학자들과 교사들은 교육이 왜 중요한지를 역설하고 설득력을 갖추려고 해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육이 중요하지 않아서 교육이 홀대받는 것이 아니다. 중요하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안다. 그보다 내가 겪었던 과거의 기억이 더 소중하고, 상처받았던 내 마음이 훨씬 소중하기 때문이다. 분노를 투사하기만 하면 되는 사람들은 교육의 본질과 학교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감정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 : 복수가 아닌 자비로움의 세계

오레스테스를 놓고 재판이 벌어진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을 뿐이라며 항변한다. 반면 복수의 여신들은 모친살해범을 용서할 수 없다며 아우성이다. 재판장을 맡은 여신 아테나는 도시에서 선발된 11명의 배심원과 함께 투표에 참여한다. 무죄에 투표한 아테나는 여성임에도 오레스테스를 변호한다. 클뤼타임네스트라가 남편을 죽인 죄가 더 무겁다는 주장이다. 오레스테스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결과는 6:6. 오레스테스는 풀려났다.

 

강력하게 반발하는 여신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테나의 몫으로 남았다. 아테나 자신이 어머니의 몸을 빌리지 않아 남자 편을 든다고 고백한다. 여성이지만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성의 실존적 자아를 아테나는 알 수 없다. 아버지 제우스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는 아테나의 탄생 신화를 반영한다. 신이라고 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공평한 판결을 하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아테나가 복수의 여신들을 설득해 자비의 여신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은 새로운 시대의 방향을 보여준다. 사람들에게 공포가 아닌 자비를 제안하고, 파괴가 아닌 탄생을 제안한다. 죽음의 검은 그림자 대신 출산과 양육의 수호신이 될 것을 권고한다.

 

<오디세이아>를 비롯한 여러 신화에서 강력한 무력을 보여줬지만, 아테나는 여신들을 차분하게 설득한다. 과거의 원한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음을 제안한다. 오레스테스의 행위를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징벌하고자 하는 마음도 수긍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테나가 여신들을 설득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규칙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인 셈이다. 복수와 복수로 이어져 결국은 파멸로 귀결되는 방식 대신, 자비의 원칙에 따라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추구해보자는 발상의 전환이다.

 

과거의 기억이 많은 사람에게 편안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나가고 있고, 우리는 잘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내가 겪었던 과거의 일이 답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사회의 발전이다. 과거 자신들의 감정에 이끌려 학교를 흔들어대는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교육의 열의를 잃어버린 교사들이 늘어나는 오늘날 학교의 상황은 미래세대에게 어떻게 비추어질까.

 

동서고금의 수많은 문학작품들은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존재의 허약한 모습에서 나를 들여다보게 되고, 그 허약한 존재의 변화를 보며 안도한다.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고, 수많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 고난을 의미 있게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의식의 각성에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정한 나를 찾아가려는 여정에 교육의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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