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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대중문화와 역사 통째로 뒤흔들다

[부산엑스포 새 시대를 연다] 
<1> 매회 ‘신문물’ 충격의 연속

엑스포는 대중문화와 역사에 기억될 만한 커다란 ‘지문’을 남겼다. 대중문화와 역사를 움직였다는 얘기다. 
 

TV, 아이스크림, 미니스커트가 대표적 사례다. 1939년 뉴욕박람회는 텔레비전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개막연설이 세계 최초로 생중계됐기 때문이다. RCA가 개발한 기술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옥상 송신탑을 이용했다. 이 역사적 방송은 당시 뉴욕에 보급된 텔레비전 수상기 200대로 시청됐다.

 

TV, 아이스크림의 탄생
 

아이스크림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박람회장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에 푹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담은 기념우표까지 발행됐다. 
 

미니스커트는 1967년 몬트리올박람회에 등장하면서 전 세계에 전파됐다. 영국관 여성 안내원이 영국 디자이너 메리 퀀트가 디자인한 스커트를 입어 눈길을 끌었다. 이 ‘과감한’ 옷차림은 당장 다른 참가국 전시관 안내원 유니폼이 미니스커트로 바뀔 만큼 파급력이 폭발적이었다.
 

엑스포는 ‘지상 최대의 쇼’로 불린 1939년 뉴욕박람회에서 변곡점을 맞았다. 기술 문명이 이룩한 인류의 성취를 집대성하는 기존 방식에 정점을 찍었다. 2차 대전 이후 엑스포는 10여 년간 정체기에 들어갔다. 이어 열린 1958년 브뤼셀박람회와 1967년 몬트리올박람회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과학기술이 야기한 비극에 대한 반성에서 평화주의와 휴머니즘, 미래주의가 강조됐다. 과시적 건축물과 상업주의, 향락 문화 대신 인류 공통과제를 논의하는 소통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69회의 공식 박람회 중 상당수는 역사적 상징성이 큰 사건을 기념했다. 세계박람회를 통해 경축의 의미를 한껏 살린 대표적 기념일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과 미국독립 100주년. 
 

1889년 파리박람회는 추진 단계부터 프랑스대혁명을 기리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박람회 조직위는 혁명 100주년을 맞은 프랑스의 진보와 성취를 상징하는 역사적 기념물을 공모했다. 그 결과 파격적인 박람회장 출입구 아치 겸 상징조형물인 에펠탑이 선정됐다. 1889년 3월 31일 에펠탑이 완공되자 설계자 구스타브 에펠과 조직위 고위 인사들은 302.6m 탑 정상에 올랐다. 이들은 예포 21발이 울리는 가운데 프랑스대혁명에서 유래한 3색 국기를 게양한 뒤 “이제 프랑스는 세계 최고 높이의 국기게양대를 가진 나라가 됐다”고 선언했다. 토마스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전구로 에펠탑을 장식했다.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 건립

 

1876년 필라델피아박람회는 미국 연방의회가 독립 100주년 기념위원회 구성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추진됐다. 필라델피아는 독립선언의 현장이자 1790~1800년 수도였다. 개막식에선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한 기념 행진곡이 연주되고, 독립선언문이 낭독됐다. 율리시스 그랜트 미국 대통령이 세계 최대 600t급 증기기관 시동 스위치를 누르자 환호성이 울렸다. 
 

가장 눈길을 끈 전시물은 횃불을 든 거대한 팔 조형물. 프랑스가 축하 선물로 보낸 자유의 여신상 일부였다. 제작이 예정보다 늦어져 오른팔만 공개됐다. 나머지 조각은 1878년 파리박람회에 전시한 뒤 운반돼 1886년에야 뉴욕 맨해튼섬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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