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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_ 아날로그 교육의 재발견1

인류가 존재하는 한 교육의 최종 마지노선은 ‘호랑이 엄마(Tiger Mother)’이며, 그 핵심은 자녀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집안에는 부모가 없고 사회에는 어른이 없으며, 도처에는 버릇없는 아이들만 있다. 이는 가르치기를 포기한 교육의 결과다. 아이가 오히려 상전(上典)으로 군림하는 시대에 교육이 설 땅은 없다.

교육 없는 교육
지금 우리나라 교육의 대세는 점점 더 교육의 본질을 외면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교육의 사전적 의미는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학생을 가르치지도 않고 그들의 인격을 길러주지도 않는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듯 활개를 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 각자의 삶을 망쳐 놓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전반적으로 어둡게 만들 공산이 크다.

가르침이 빠진 교육은 교육이 아니며, 교육이 없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가르침을 중시하던 교육문화를 갖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건국 수십 년 만에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 국가로 성장하게 된 힘의 원천도 다름 아닌 교육에 있었다. 교육이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에서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특히 가르치는 일을 교육의 본령(本領)으로 삼았던 1950~70년대에 비교하면 요새는 실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열심히 가르치는 교육자도 별로 없고, 열심히 배우는 학생들 또한 별로 없는 안타까운 세태가 된 것이다. 

아이는 상전(上典)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참으로 소중한 가치다. 모든 인간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청소년이나 학생들까지 일반 성인과 똑같은 권리를 누리는 세상은 동서고금에 없다. 무릇 인류의 문명이란 미래세대를 가르치는 일을 통해 진보를 거듭해 왔다. 유독 인간 세계에서만 힘들고 오랜 사회화 기간을 거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미래세대를 억압하거나 통제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 하나의 인격체로서 스스로의 삶을 남과 더불어 꾸려 나갈 수 있는 실력을 배양시키려는 선의에서다. 원칙적으로 말해 교육은 서로 대등한 관계 속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란 인격이나 지식의 측면에서 우월적 위치에 속한 편이 앞에서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먼저 태어난 이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선생(先生)’이라는 말 자체가 바로 그런 뜻이다. 그런 만큼 교육에는 일정 부분 권력관계가 성립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나라 교육현장에서는 민주주의를 절대선(絶對善)인 양 신봉하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민주적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도 있지만, 학생은 기본적으로 피교육자일 뿐이다. 그들의 인권이나 인격은 사제지간이라는 틀 속에서만 성립될 뿐이다. 예컨대 학생의 두발이나 복장을 자유화하는 것이 교육의 효과를 더 높인다는 보장은 없다. 선진국의 경우 우리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학생들의 용모나 행동을 규제한다. 학생들이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결코 아니며, 직접적인 체벌을 허용하는 나라도 적지 않다. 선진국의 명문학교일수록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미세한 조정과 세세한 통제의 대상이 된다. 바로 그것이 미성년자 학생이 응당 받아야 할 당연한 사회적 대접이다. 우리나라의 교육현장처럼 학생들을 방종한 상태로 내버려 두는 나라는 세상에 드물다.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선생님들은 교육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고 열세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작금의 시대정신은 교육자로 하여금 본래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다. 비단 학교 내 학생들뿐만 아니다. 집안에서나 바깥에서 아이들을 나무라고 야단치는 부모를 도무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도처에 버릇없는 아이들이다. 한둘만 낳아 자식이 다들 귀한 데다가 그저 공부만 잘한다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되는 것이 현재의 사회 분위기인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눈치만 이리저리 살피기 일쑤며, 남의 자식의 행동에 간섭하는 일은 일종의 사회적 금기처럼 되어 버렸다. 집안에는 부모가 없고 사회에는 어른이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스승의 날에 아이들이 어른에게 회초리를 드는 퍼포먼스는 천하의 난센스이지 싶다. 혹자는 아이들의 인권과 인격을 예우하는 것이 장차 민주시민을 배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면 그런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시민이란 애 어른 구분 없는 자연 상태에서의 방임이나 방종이 아니라, 교육과 학습을 통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는 그 무엇이다. 민주주의란 각 개인들의 원초적 본능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가 꾸준히 노력하고 관리해온 결과다. 지금처럼 가정과 학교에 만연한 민주주의의 강박 관념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오히려 해로울지 모른다. 서구의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착한 시민이 능사(能事)가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 초ㆍ중ㆍ고교 학생들의 희망 직업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안정적인 직업군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게 지속되고 있다. 교사나 공무원, 의사 등이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처럼 대통령이나 장군 혹은 부자가 되겠다는 꿈은 말할 것도 없고 인기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되겠다는 희망도 크게 줄었다. 그저 편한 직업이나 안정된 직장이 좋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교사나 공무원이 중요한 직업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편하고 안정된 미래를 지향하는 것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우려할 만한 일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이른바 ‘착한 아이(good boy)’ 신드롬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칭찬받고 싶고 아무에게도 미움받거나 비난받고 싶지 않은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남보다 앞서지 않고, 앞서더라도 눈에 잘 띄지 않게 그저 평범한 소시민에 안주하려는 자세다. 자신의 성취를 과시하고 드러내는 대신 동료와의 평균적 삶에 자신을 감추거나 묻고자 하는 경향도 마찬가지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무슨 죄인이라도 되는 양 흔히 ‘범생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의 대표적 방증이다. 이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는 말이 유행했던 지난 시절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요즘 우리나라 ‘소년들은 더 이상 야망을 가지지 않는다(Boys ‘no more’ be ambitious).’

물론 사람이 착하게 사는 것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의 결과로서 청소년 특유의 야망과 용기가 급속하게 조락(凋落)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진취적인 도전의식이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사회의 정신적 조로(早老) 내지는 노화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부모든 사회든 ‘착한 아이’를 너무 강조하게 되면 아이 자체도 망가지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 전체가 활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른바 ‘착한 아이의 비극’이 바로 그것이다. 국가와 인류의 미래를 감당할 후속세대에게 교육자들은 야망과 책임감 그리고 도전의식을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각자가 편하고 행복한 사회도 좋지만, 세상 전체를 걱정하고 준비하는 엘리트주의의 가치를 시급히 복원시켜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리더십(leadership)이 아닌 팔로우십(followship)을 먼저 가르치는 세간의 풍조는 참으로 개탄스럽다. 경쟁사회의 현실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오늘날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쟁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다. 경쟁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정당하게 승리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점, 그리고 승리의 결과를 독식하는 대신 남들과 공유하고 사회 전체를 위해 베풀어야 한다는 점을 교육자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아이가 오히려 상전(上典)으로 군림하는 시대에 교육이 설 땅은 없다.
미국 예일 대학 로스쿨 교수인 에이미 추아(Amy Chua)는 얼마 전 범세계적인 교육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발단은 그녀가 출간한 『타이거 마더(Tiger Mother)』라는 책이다. 그녀는 재미와 창의성을 중시하고 개성과 자율을 강조하는 이른바 미국식 혹은 서양식 교육 대신, 통제와 엄격한 규칙을 강조하는 중국식 혹은 동양식 교육 나름의 장점을 설파했다. 추아 교수의 기본 전제는 애들이란 ‘스스로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녀들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실력이나 올바른 습관, 자기 확신 같은 지고의 가치를 강압적으로라도 무장시켜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추아 교수는 암기와 단순학습의 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추아식 교육관에 대한 찬반을 떠나 그것이 사회적으로 논쟁을 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어 보인다. 민주주의 교육도 좋고 자율수업도 좋고 토론식 학습도 좋다. 그렇다고 해서 주입식이나 암기식과 같은 ‘숟가락으로 떠먹이기(spoon feeding)’ 방식이 반(反) 시대적이거나 비효율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교육에 그나마 원칙과 기율(紀律)이 살아있는 미국에서 터져 나온 교육 논쟁인데, 만약 그녀가 현재 한국의 교육현장을 직접 보았다면 아마도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더욱더 확신했을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교육의 최종 마지노선은 ‘호랑이 엄마’이고 그것의 핵심은 자녀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교육이론이나 교육철학이 아무리 거창하고 심오하더라도 교육의 알파요 오메가는 권위와 책임감을 통해 이전 세대가 후속 세대를 가르치는 일이다. 교육에 가르침이 빠져있는 우리나라 교육은 현재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전반적으로 실패 중이다. 어른이 아이를 상전으로 받드는 나라, 대부분 착한 소시민으로 살겠다는 아이들을 어른들이 가만히 방관하는 나라, 이런 나라에서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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