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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역사를 영어로 적으면 히스토리(History)다. 여기에 착안해 어떤 사람은 역사가 대부분 남성들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라고 한다. 조금 과격해 보이는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역사에서 여성의 이야기는 특별하다. 세상의 반이 여성이지만 과거의 역사 기록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지금부터라도 역사 기록의 방향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 역사 기록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남성들의 기록에서 여성들을 찾아보는 노력을 해 보면 어떨까. 여성의 삶을 혼자 개척한 모습도 있지만 이번에는 부부의 이야기를 찾아보려 한다. 번잡한 것 같지만 사람의 인생은 외로운 것이라고 한다. 그런 긴 인생을 같이 갈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건 위안이며 삶을 살아갈 힘이 될 수 있다. 가을을 맞아 꼭 배우자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소중한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의 가치를 생각해 볼 역사 유적을 찾아본다. 



단양 온달산성 
 
우리나라 사람 중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워낙 유명하다보니 약간의 부작용이 있다. 실제 역사 사건이 아니라 ‘전래동화’ 쯤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삼국사기> ‘열전 ’에 등장하는 역사 속 주인공이다. 몇몇 역사 사건에도 온달이 등장한다. 역사 유적도 있다. ‘온달산성’으로 추정되는 곳도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과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 두 곳이나 있다.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는 온달의 말과 연결해 본다면 단양의 온달산성이 그럴 듯 해 보인다. 
 
어떻게 이 산성에 온달의 이름이 붙었을까? 먼저 산성을 보자. 남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 가다보면 평탄한 구릉으로 된 충주와 달리 단양쯤 이르면 높은 봉우리가 강을 굽어본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되는데, 그 하늘과 닿은 곳에 산성이 있다. 둘레가 680m정도 되는 작은 산성이지만 돌을 깎아 세운 성벽의 모습은 위엄이 가득하다. 
 


이 산성은 원래 고구려 영토에 포함됐다. 하지만 고구려가 북쪽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신라가 차지했다. 이를 원통하게 여긴 온달이 산성을 되찾고자 왕의 허락을 받아 온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시작할 즈음, 흐르는 화살 하나가 온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여러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온달로서는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공을 이루기는커녕 제대로 싸움도 한 번 못해보다니. 
 
원통함은 뜻밖의 상황을 만들었다. 온달을 눕힌 관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고구려 군으로서는 대장을 잃었으니 계속 전쟁을 할 수도 없고, 대장을 버리고 퇴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진퇴양난에 빠졌을 때 평강공주가 관을 찾았다. 슬픔으로 정신을 잃을 만도 한데 공주는 상황을 파악했다.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됐습니다. 이제 떠나시지요.’ 관을 어루만지며 공주는 죽은 온달을 달랬다. 온달이 여기에 오기까지 공주가 있었다. 지혜로운 부인이며 스승이었을 공주의 마지막 말을 온달은 받아들였다. 드디어 온달의 관이 움직였고 군대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온달 이야기의 주인공은 평강공주인 셈이다. 이야기의 제목을 ‘평강공주와 온달’로 바꾸는 것도 좋겠다. 
 
온달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무척 힘들다. 이런 곳에서 전쟁을 하겠다는 온달의 용기가 무모하게 느껴질 정도다. 땀을 닦고 산성에 오르면 어려웠던 여정이 보상된다.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남한강, 그리고 하트 모양의 아름다운 온달산성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벽 어딘가에 앉아 이들 부부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가을은 금세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 것이다.



익산 미륵사 터

익산 미륵사 터는 백제를 대표하는 역사 유적이다. 아니, 우리나라 고대사를 대표하는 장소다. 그래서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최근까지 복원공사를 한 서쪽 석탑을 포함해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뉜 절터의 거대함은 사람들을 압도한다. 백제 역사 기록이 부족하기만 한 지금, 미륵사의 옛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또 다른 백제를 찾을 수 있다. 
 
미륵사 터에 도착하면 전시실의 안내문이나 누군가의 설명을 통해 ‘무왕’이 ‘왕비’의 요청으로 이 절을 짓게 됐음을 알게 된다. 무왕은 ‘마를 캐던 아이’ 곧 ‘서동’이며 의자왕의 아버지로 백제의 강성함을 다시 찾은 왕이다. <삼국사기>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무왕이 왕족일 가능성만 보여주는 정도다. 그런데 왕족이라 하더라도 마를 캐던 신분에서 왕이 될 수 있었을까.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 그 유명한 ‘서동요’다. 서동이 신라의 ‘선화공주’가 이미 자신과 가까운 사이임을 알려 부인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면 당시 신라와 백제는 적대적이었을 텐데 어떻게 백제 왕족과 신라 왕족의 혼인이 가능했는지 궁금한 일이다. 
 
실제 많은 역사 연구자들이 이 부분을 해결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최근 기운이 빠질만한(?) 역사 유물이 등장했다. 미륵사 터 석탑 아래에서 나온 ‘금제사리봉안기’에서 무왕의 왕비가 당시 백제 귀족인 ‘사택적덕’의 딸로 나왔다. 이제 나라와 나라를 넘나드는 기발한 사랑 이야기는 잠시 접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무왕이 자신의 힘만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얘기하기는 이르다. 바로 왕비, 신라의 공주는 아니었지만 백제 귀족인 사택적덕 가문과 왕비의 역할이 컸음은 분명한 일이다. 왕위에 오르고 또 권력을 잡아 백제를 대표하는 왕으로 자리를 잡는데 부인을 빼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무왕은 거대한 불사(佛事)인 미륵사 건축을 왕비의 의견에 따라 진행한 것이다. ‘왕비’가 돼서 그런지 혼인 이전의 애틋한 삶은 그 뒤에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무왕에게 왕비는 은인이며 또 왕비로서 주요 문제를 상담할 파트너였을 것이다. 미륵사는 부부의 원대한 꿈을 이룬 공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