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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주의, 인본주의를 고집한 교육자 스승 순자(3)


나는 미신과 주술을 모른다

순자의 천론(天論)편 서두를 보면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주역점을 잘 아는 자는 주역점을 치지 않는다.” 정말 주역을 잘 아는 이는, 주역이 제시하는 건강한 상식을 아는 이는, 그걸 바탕으로 세상을 살지 따로 점을 쳐서 그걸 믿고 의지하고 집착한 채 살지 않는다는 말이죠. 사실 순자는 원래 운명론, 미신, 주술적 인식을 매우 싫어했는데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은 천론(天論)편의 서두입니다.


천행유상( 天行有常 )

하늘의 운행에는 한결같은 법도가 있으니

불위요존( 不爲堯存 ) 불위걸망( 不爲桀亡 )

요임금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걸임금 때문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응지이치즉길( 應之以治則吉 ) 응지이난즉흉( 應之以亂則凶 )

다스림으로 응하면 길하고 어지러움으로 응하면 흉하다

강본이절용( 彊本而節用 ), 즉천불능빈( 則天不能貧 )

양비이동시( 養備而動時 ), 즉천불능병( 則天不能病 )

근본에 힘쓰고 물자를 아껴 쓰면, 하늘이라도 가난하게 할 수 없고

준비를 잘하고 때맞게 움직이면, 하늘이라도 병들게 할 수 없다.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하늘이 감동 했다, 하늘이 화와 복을 내린다.” 고대 동아시아인들은 하늘에 어떤 종교적 감정과 가치관을 투영해서 보았고 사실 지금도 우리는 거기서 자유롭지 않은데 이는 순자가 한 말입니다. 하늘은 그 자체의 질서로 돌아가는 객관적 조건 내지 자연일 뿐이 며 인간은 그 조건에 응해 자신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면 하늘도 어쩔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스림으로 응하고 근본에 힘쓰며 물자를 아껴 쓰면 마음속에 하늘을 뫼시든 안 뫼시든 잘 살 수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순자는 주술, 미신적 사고를 싫어했습니다. 인간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길흉과 치란은 인간과 또 인간 집단의 노력 여부에 달린 것이 니 주술, 미신적 사고와 인습에서 벗어나라는 위대한 선언인데요, 그게 바로 순자의 합리주의며 인본주의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합리주의, 인본주의라고 하고 넘어가기엔 좀 아쉽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교육자 순자, 스승 순자와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상 좋은 것보다 행동 규범이 우선이다

“사람의 관상을 보는 이는 옛사람들에게도 없었고 학자들도 얘기하지 않았다. 예전에 고포자경(姑布子卿)이란 이가 있었고 양나라에 당거(唐擧)라는 이가 있어서 사람의 형상과 안색을 보고 그의 길흉과 화복을 알아낸다고 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칭송하지만 옛사람들에게도 없었고 학 자들도 얘기하지 않은 일이다.”


“외형이 비록 나쁘다 하더라도 마음과 행동 규범만 훌륭하다면 군자가 되는 데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 외형이 비록 훌륭 하다고 하더라도 마음과 행동 규범이 나쁘면 소인이 되는 데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


관상 같은 것, 얼굴 보고 사람이 잘될 것이다 못될 것이다 판정하는 그런 것 믿지 말라고 하는 순자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인력 수요가 컸던 때라 사람을 잘 가려 뽑아 관리로 삼아야 했는데 그때부터 관상이란 게 시작되었나 봅니다. 사실 우리도 취업이나 승진에 관상을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예전에는 더했겠지요. 하지만 순자는 ‘신경 쓸 것 없다, 무시해도 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순자가 스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순자의 이런 태도는 사상적 라이벌인 묵가 무리를 의식해서 그런 감도 있습니다. 묵자의 제자들이 유가 내부에 있던 운명주의, 숙명주의를 강하게 공격했지요. 세상의 어지러움은 공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심해지는데 종사 공자께서 주장한 대로 인(仁), 의(義), 덕(德)을 실천해도 세상은 알아주지 않고 구세를 실천할 길은 막막하고, 그러다 보니 패배적 운명주의와 비관적 숙명주의가 유자들 내에 많았는데 그걸 묵가가 지적했지요. 철저히 공자 사상의 약점을 메꿔 진화시키려고 했던 순자는 유가 내부의 그런 비합리적 요소나 운명주의를 모두 털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교육자로서 자의식이 강했고 그게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제가 누군가를 가르치고 누군가를 지도한다면 저부터도 그러겠습니다. “사주가 나쁘다고 해도 신경 쓰지 마라. 관상 그런 것 무시해라. 집안 환경 안 좋아도 상관없다. 설사 장애가 있어도 괜찮다.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 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순자의 합리주의와 인본주의 신념은 결국 독려와 격려를 위한 겁니다. 그가 철저히 주술적 사고와 미신을 멀리하려고 한 것은 교육자로서 기본을 지키기 위한 것이 었습니다.


“관상을 보는 것은 마음을 논하는 것만 못하고 마음을 논하는 것은 행동 규범을 잘 가리는 것만 못하다. 형상은 마음만은 못하 고 마음은 행동 규범만은 못하다.”

비상(非相)편에서 순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관상 좋은 것이 마음가짐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가짐 좋은 것이 몸가짐 바른 것만 못하다는 말인데 전형적인 교육자의 자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준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지만 둔한 말도 열 배의 노력과 시간을 들이면 준마를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무궁한 것을 추구하고 끝없는 것을 추구하려 한다면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끓어지도록 애써도 평생토 록 미치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목표가 되는 곳이 있다면 천 리가 비록 멀다고는 하더라도 혹은 늦다고 하고 혹은 빠르기도 하며 혹은 앞서기도 하고 혹은 뒤처지기도 하겠지만 어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수신(修身)편에서 순자가 한 말입니다.

둔한 말도 준마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꾸준해야 한다는 것이죠. 열 배의 노력도 마다하지 않아야 따라잡을 수 있고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력 이전에 목표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순자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수원을 막고 물길을 달리 낸다면 장강이나 황 하도 말라붙게 된다고 말이죠. 또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오른쪽으로 갔다 하면 여섯 말의 준마가 수레를 끈다 해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준마(駿馬)와 둔마(鈍馬)는 순자답게 예시와 비유로 설명을 했는데 순자는 더 나아가 자라 이야기를 합니다.


“반 걸음씩 걸으면 절름발이 자라라 하더라도 천 리를 갈 수 있다.”


자라, 그것도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갈 수 있답니다. 규보불휴파별천리( 蹞 步不休跛鼈千里) 유명한 말인데, 더 줄여서 사자성어로 파별천리(跛鼈千里)라고도 합니다. 열심히 배우고 배운 것을 부지런히 노력하면 누구든 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데 순자 텍스트를 보면 ‘할 수 있다, 될 수 있다, 가능하다’ 라고 이렇게 독려하고 격려하는 말들이 많이도 나옵니다. 역시나 교육자라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중요한 건 배우는 사람의 노력과 실천이지요.


“갈 길이 비록 가깝다 하더라도 가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 일이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하지 않으면 이룩되지 않는다.”


수신편에서 한 말인데 가야 합니다, 그리고 해야 합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고 작은 것이라도 행해야지요.


과소평가된 순자의 철학과 사상

순자하면 대중들에게 성악설의 아이콘입니다. 순자하면 대뜸 성악설을 말하는 학생들이 아주 많죠. 그래서 인간을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본 인물로 아는 사람들이 많고 그러다 보니 순자의 철학과 사상까지도 과소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정작 텍스트를 펼쳐보면 인간에 대한 신뢰와 긍정이 넘쳐 납니다. ‘할 수 있다, 될 수 있다’ 는 믿음이죠. 신뢰고 낙관입니다. 얼마든지 거듭나고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 최소한 배움의 뜻을 가진 학생들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말일 겁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낙관, 긍정이 없다면 어느 누가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고 믿겠습니까? 학생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 부지런히 격려하고 독려하는 교육자가 있을 수 있을까요?


군사정권 시절, 우리가 고도성장하던 시절에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 는 식의 레토릭이 아닙니다. 늘 수업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고민하고 충실하게 사례와 비유를 만들고 찾아 학생들을 가르쳐왔으며 미신과 주술을 거부한 합리주의와 인본주의를 고집하는 교육자의 철학인 것이죠. 자. 이쯤 되면 성악설의 순자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기억해야하지 않을까요.


천하는 어두워 알지 못하고

밝은 세상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봐 시름만이 끝이 없구나.

천 년이면 반드시 세상이 뒤바뀐다는 것은 옛날부터의 법도이니

제자들아 학문에 힘쓰고 있으면 하늘은 그것을 잊지 않으리니 성인께서 두 손 모아

기다리는 때가 곧 올 것이네.


부(賦)편에 실린 시입니다. 제자백가 사상가 중 유일하게 제자들에게 최후의 당부, 유언을 남겨둔 사람인데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순자는 스승이며, 선생이고 교육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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