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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실크로드, 사막을 가르다 (3/6, 불타는 도시, 투루판)

여행지 : 화염산, 고창고성, 이스타나 고분군, 포도구, 소공탑, 야시장, 철문관(쿠얼러)
여행일 : 2011/07/19, 20, 21

투루판은 한마디로 태양의 도시, 분지의 도시, 포도의 도시라 할 수 있다. 50°까지 올라가는 여름철 기온은 20mm를 넘지 못하는 강수량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여름과는 달리 습도가 높지 않아 기온은 높았지만 후덥지근하지 않았고 그늘에만 들어가도 서늘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낮은 해발 -150m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어 천산의 만년설를 쉽게 끌어올 수 있었다.

이런 환경은 투루판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 산지로 만들었다. 무더운 날씨와 적은 강수량은 포도의 당도를 높였고 풍부한 물로 대규모 재배가 가능케 했다. 특히 건포도가 유명해 어디를 가든 포도구(포도를 건조시켜 건포도로 만드는 시설)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숙소에 짐을 맡겨놓고 택시를 대절해 화염산으로 향했다. 화염산으로 가는 도로 우측으로 황토빛의 빈 집들이 많이 보였는데 한때는 사람이 살았지만 지금은 물이 말라버려 모두 떠나버렸단다. 을씨년스럽게 변해가는 우리네 농촌과 이유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공동화라는 결과만은 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길 좌측으로는 천연가스를 채취하는 시추장비들이 자주 보였다. 신장 지역에 묻혀있는 엄청난 지하자원이 실감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빈부격차로 몸살을 앓고 있는 중국의 모습이 떠오기도 했다.

허허로운 벌판을 달리자 택시기사가 왼쪽으로 보이는 산을 가리킨다.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모습은 여느 산과 틀리지 않았지만 특이하게 침식된 산사면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위로 타오르는 화염은 투루판 분지를 모조리 태워버릴 기세다. 나무 한그루 자라지 않는 민둥산에선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화염산, 이곳은 투루판을 대표하는 ‘뜨거운 명소’로 <서유기>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현장법사(경장, 율장, 논장에 모두 정통해 삼장법사라고도 함)를 모시고 천축국(인도의 옛 이름)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손오공이 불타는 화염산을 만나자 철옹 공주가 갖고 있던 파초선을 이용해 무사히 지나간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손오공 일행을 형상화한 동상과 대형 온도계가 보이는 문화관을 직접 들어가지는 않고 그 담장 밖에서 화염산 일대를 둘러보고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고창고성. 옛 고창국의 수도로 화려했던 당시의 모습은 많이 사라져버렸고 몇 몇 건물의 흔적만 간신히 남아있는 곳이다. 40元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자 마차를 매단 나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또각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고성의 비포장 대로를 달려가자 지친 엉덩이가 신나게 들썩거린다.

고창고성의 찬란한 폐허는 새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더욱 스산하게 다가왔다. 이곳에 있었을 성곽과 궁궐, 집과 거리, 상점은 허물어지고 침식되어 마치 자연 상태의 기암들처럼 보인다. 벽체에 뚫려있는 사각형의 홈을 통해 인간의 흔적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고성의 중앙으로 들어가자 옛날 현장법사가 고창왕과 대중을 모아놓고 부처님 말씀을 전했다는 설법전이 보인다. 상대적으로 잘 보존된 설법전은 흙벽돌을 빙 둘러쌓은 돔형식의 건물로, 현장법사가 천축국으로 가기 위한 경제적 지원을 받는 대신 ‘인왕반야경’을 설법했다는 곳이다. 아울러 현장은 불경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다시 설법할 것을 약속했단다. 하지만 17년 후 인도에서 경전을 구하고 돌아왔을 때는 당나라의 침입으로 이미 멸망한 뒤였으니 그의 쓸쓸함도 오죽했을까. 아, 일장춘몽의 삶이여라…







이번에는 고창국 주민의 공동묘지였다는 아스타나 고분군(20元)을 찾았다. 정면에는 중국인의 탄생설화에 나오는 ‘복희 여와상’이 있는데 뱀의 몸통을 가진 남녀(남자는 복희, 여자는 여와)의 휘감긴 모습이 진한 사랑을 나누듯 상당히 에로틱했다.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가자 군데군데 파헤쳐진 너른 공터가 나타난다. 4백여 개의 고분이 발견되었다지만 일반인에게는 세 개의 고분만 공개되고 있었다. 비스듬히 들어가는 고분의 입구는 책에서 본 피라미드의 내부로 통하는 회랑을 연상케 했는데 한낮의 태양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 고분에는 서로 부부였다는 미라가 투명한 유리관에 평행하게 뉘어져 있었는데 수분이 빠져버린 육신은 냉장고에 보관된 오래된 오징어처럼 말라 있었다. 사막지형의 건조함이 만들어낸 현상이라지만 천년 이상을 이런 상태로 지내왔다니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죽음은 육신의 소멸을 가져오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이곳의 기후가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일행은 택시기사의 안내를 받아 포도구로 향했다. 이곳은 화염산 기슭의 골짜기로 포도농장과 식당이 밀집해 있는 일종의 관광단지다. 당연히 입장료를 지불하고 입장해야 했지만 이곳 출신이라는 택시기사의 주선으로 우회해서 입장했다. (이 일로 택시기사는 처음 약속보다 높은 요금을 요구했다.)

포도 넝쿨이 길게 터널에 들어서자 길 양쪽으로 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우리는 여기서 포도와 건포도를 맛본 뒤 점심을 먹었다. 특히 부드럽게 삶아진 양 수육이 맛있었는데 양 꼬지처럼 자극적이지도, 특유의 비릿한 냄새도 없었다.

배를 채운 우리는 위구르 왕이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소공탑(30元)을 둘러봤다. 신장위구르 지역에서 가장 높다는 이 탑에 올라가면 투루판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고 했지만 U자 형으로 무너져 버린 본관 담벼락의 보수공사 때문인지 탑 위로는 올라갈 수 없었다.






화염산, 고창고성, 아스타나 고분군, 포도구, 소공탑, 이렇게 다섯 곳을 둘러봤다. 택시를 대절해 이동한데다 다른 도시에 비해 관광지가 밀집해있어 수월하긴 했지만 그동안의 피로가 쌓이다보니 많이 지친 것도 사실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이른 시간(오후 4시)이었지만 호텔에서 휴식을 취한 후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저녁 9시, 한국이라면 어둑해질 시간이지만 이곳은 아직 정오의 열기도 체 가시지 않은 오후다. 무더운 열기를 가르며 인근 시장으로 향했지만 주민들의 일용 잡화나 기념품을 파는 가계를 제외하고는 편히 쉬면서 먹을 만한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둥글게 구워낸 이곳 빵인 ‘낭’에다 수박, 하미과, 자두 등의 과일, 시원한 맥주를 한아름 사가지고 호텔(교하장원)로 돌아왔다.

과일과 낭으로 저녁을 대신한 우리는 여행의 여독을 풀기 위해 내일 하루(20일)는 특별한 일정을 잡지 않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외국 배낭여행 중에 금쪽같은 하루를 쉰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갈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여행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은 ‘삶의 여유’가 아니던가. 여유를 찾으러 왔다가 무리한 일정에 치어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려서야 되겠는가. 인생이 그렇듯 늘 전력질주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적당한 휴식을 통해 몸을 쉬게 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 또한 여행의 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여행길에 오른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여행이 아닌 ‘나’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 평소 같으면 바쁘게 시작될 하루였지만 오늘만큼은 느긋하게 시작한다. 늦은 아침을 먹고 늦은 세수를 하고 늦은 휴식을 취했다.

침대에 누워 어제 여행을 메모하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는다. 투루판을 기록하고 유토피아를 상상하다보니 자그마한 호텔방이 현실과 상상의 두 공간을 이어주는 통로가 된 듯했다. 그러다 눈이 감기면 잠을 청했고 하얀 시트 속에 파묻혀 또 다른 세계를 여행했다.

베이징부터 줄곧 한방을 써온 룸메이트는 핸드폰 게임에 열중이다. 손아귀에 쥔 작은 액정 속으로 당장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다. 0과 1의 디지털 조합인 게임은 전원을 꺼버리면 사라져버릴 상상 속의 세상. 하지만 정해진 룰에 의해 제한적으로 움직이는 게임에 비해 현실은 수많은 변수와 시행착오로 가득했다. 세이브도 되지 않고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도 없다. 계획대로 진행되지도 않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불확실함이 현실을 살아가는 매력이 아닐까. 결국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도 이곳, 아날로그 세상인 것이다.






반나절을 작은 호텔방에 있다 보니 조금씩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베제크리크 천불동, 교하교성에 다녀올까도 생각해 봤지만 대기를 채운 투루판의 열기를 생각하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아쉬우나마 호텔 주변을 산책 나왔다. 호텔 정원에 심어놓은 탐스러운 포도송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씨알이 굴지는 않았지만 당도는 여느 포도 못지않았다. 하지만 그늘을 벗어나자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고 기다리던 한증막처럼 턱! 숨이 막혀온다. “아하, 여기는 투루판 이었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래, 여기는 50도를 웃도는 태양의 도시 투루판이었다. 선크림을 바르고 나왔다지만 그 엷은 막으로는 이곳의 태양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하늘에서 쏟아지는 축복을 온몸으로 즐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거리에는 오토바이나 이를 개조한 삼륜택시를 탄 사람들 외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남성들은 이슬람을 상징하는 둥근형태의 빵모자(토피)를, 여성들은 이슬람식 머릿수건인 히잡을 많이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전통 히잡이라기보다는 더위를 피할 목적을 겸한 스카프가 많이 보였다. 이슬람 문화권이라고는 하지만 그리 엄격한 복식 규칙은 따르지 않는 듯 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조금 눈을 붙인 후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이곳이 이슬람 문화권인지라 식당에서도 공개적으로 술을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지하에 마련된 별실에서 저녁을 먹었다. 닭과 양 요리와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노주를 마셨는데 이제는 그 참 맛을 알 것 같았다. 처음에는 특유의 플라스틱 향이 거슬렸는데 몇 번을 먹다보니 오히려 그 향이 그리워진 것. 거기다 뒤끝까지 깔끔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한국에 가서도 이 ‘플라스틱’ 향이 그리울 것 같다.






다음날(21일) 오전, 쿠얼러행 버스에 올랐다. 투루판을 빠져나간 버스는 이내 험준한 산악지대로 접어들었다. 칼날같이 튀어나온 능선은 상하로 요동치는 지진계의 눈금처럼 날카로웠다. 몽유도원도의 기암사이를 유람하는 기분이랄까, 거센 파도를 연상시키는 산세가 나를 덮치려 했다.

버스는 협곡 사이로 난 길을 따라 ‘之’자로 방향을 틀어 올렸다. 어디선가 매복이 숨어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휘청거리는 버스를 에워싼다. 드문드문 세워진 송전탑을 어떻게 세웠을지 경이롭기까지 했다.

중간에 들른 휴게소에서 국수로 점심을 대신했다. 소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소스를 간짜장면 식으로 섞어 먹었는데 기름기가 많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입맛에 맞았다.

식사 후 잠시 쉬고 있으려니까 화장실을 다녀온 일행이 꼭 한번 가볼 것을 추천한다. 모퉁이를 돌아 건물 뒤편으로 가자 저기 ‘남, 여’라고 적힌 한자가 보였다. 입구도, 천정도 없이 2m 높이로 벽돌을 쌓아 만든 화장실에는 A4용지 크기의 구멍이 1m 간격으로 뚫려 있었고 그 아래로는 급한 경사지가 펼쳐져 있다. 그러니까 생면부지의 사람과 엉덩이를 나란히 까고 일을 봐야 하는 구조로 보통 급하지 않고서는 일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공간의 제약 없이 설계된 ‘개방형 구조’인 것. 과거 중국사회가 폐쇄적이었다지만 화장실만큼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개방된 것 같다.



쿠얼러, 10시에 투루판을 출발해 5시에 도착했으니 대략 7시간 정도를 달려 온 샘이다. 호텔로 가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바로 철문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두 바위산 사이에 만들어진 일종의 관문으로 옛날에는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C자 형으로 길게 굽어진 협곡을 택시로 둘러본 후 우리의 옛 성문처럼 꾸며놓은 철문관 아래를 걸어봤다. 하지만 세트장처럼 덩그러니 들어앉은 모습이 그리 인상적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옥문관처럼 다 허물어졌을망정 역사의 깊이를 온전히 느껴볼 수 있는 곳이 더 매력적인 것 같았다.

갑자기 유창한 중국말로 우리를 안내하던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묵기로 한 호텔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 매표소의 한족 도움으로 여기저기 연락해 보았지만 그런 이름의 호텔은 쿠얼러에 없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헠, 중국 땅에서 노숙이라도 해야 하나?

한국 여행사에 연락해보니 여행사에서 잘못 인쇄된 일정표를 우리에게 줬다는 것이다. 호텔은 실제 쿠처에 있었지만 우리에게 준 일정표는 쿠얼러에 있다고 적혀있으니 당연히 없는 호텔이라고 나올 수밖에... 한가한 오후시간이라 여유를 부렸지만 이제는 갈 길이 멀어졌다. 급히 쿠얼러 터미널로 되돌아와 쿠처행 버스표를 구했다.




버스는 해가 지는 서쪽을 향해 달려간다. 중국시간으로 밤 10시가 넘어서자 붉은 기운이 서쪽 하늘을 뒤덮기 시작한다. 하늘을 수놓는 주홍빛은 여행의 고단함도 따뜻함으로 바꿔버렸다. 곧이어 자주색과 남색이 차례로 하늘을 덮더니 곧이어 검은 커튼이 내려지듯 시꺼멓게 변해버린다. 하지만 버스는 일몰의 기원을 쫓아가는 탐사대라도 된 듯이 악착같이 노을의 끝자락을 따라붙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10시간 이상 버스를 탄 샘이다. 팔다리가 쑤시고 어깨도 뻣뻣했다. 하지만 쿠처에 도착했다는 말에 조금은 힘이 생긴다. 자정을 넘어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인근 식당에서 준비한 양 꼬지와 맥주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이번 여행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야밤의 정취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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