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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원전으로 만나는 아킬레우스


<일리아스>는 "트로이아 전쟁(기원전 13세기) 중에 아킬레우스라는 영웅이 분노한 사건"을 노래한 구송시로 기원전 8세기에 호메로스가 문자로 정리했다고 한다. 일단 <일리아스>의 내용을 대략 살펴보자.

트로이아와 9년 째 전쟁 중인 회랍군(아카이아인)은 테베라는 도시를 함락시킨 후, 아가멤논은 크뤼세이스라는 여인을, 아킬레우스에게는 브리세이스라는 여인을 선물(전리품)로 챙긴다. 하지만 아가멤논이 차지한 크뤼세이스는 아폴로 신을 모시는 사제의 딸이었기에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이에 화가 난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 준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버렸고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빠지게 된다.

그사이 회랍군의 메넬라오스와 트로이아군의 파리스(트로이아의 왕자이자 헥토르의 동생)가 헬레나를 놓고 대결을 펼친다. 사실 이번 트로이아 전쟁은 미의 여신이 된 아프로디테가 메넬라오스(회랍군)의 부인이었던 헬레나를 파리스에게 선물로 준 것이 발단이 되었기에 둘의 대결은 각별했다. 이 싸움에서 파리스가 패하지만 헬레나를 돌려보내지는 않았고 따라서 회랍군과 트로이아군의 전쟁도 계속되었다.

아킬레우스가 출전하기 않은 상태에서 몇 차례의 밀고 밀리는 진퇴를 거듭하자 아킬레우스의 절친이던 파트로클로스가 그의 옷을 빌려 입고 출전한다. 하지만 트로이아의 영웅이던 헥토르(트로이아의 왕자)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이에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전쟁에 복귀하게 된다. 희랍군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아로 진격해 헥토르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끌고 온다. 며칠 후 헥토르의 아버지이자 트로이아의 왕인 프리아모스는 어두운 밤에 홀로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헥토르의 시신을 찾아온다. 그리고는 성대하게 장례를 치른다. (<일리아스>는 여기서 끝난다. '트로이의 목마'는 그 이후의 일로 <오뒷세이아>에 등장한다.)

<일리아스>를 한마디로 말하면 아킬레우스의 활약사로 보면 되겠다. 하지만 단순히 아킬레우스만을 위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이야기의 규모와 상징, 숨은 이력이 너무 방대했다. 또한 그리스 신화의 내용이 첨가된 서사시 형식이라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시중에 나와 있는 번역서나 해설서마저도 외국의 번역서를 재번역한 수준이라 그 의미가 원문과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저자(강대진)는 <일리아스>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이 주석서를 출간했다고 한다.

과연 저자의 말처럼 쉽게 읽혀졌다. 그리스 신화를 잘 모르는, 영화 <트로이>(2004)에 익숙해져버린 일반인을 위해 하나에서 열까지 친절하고 꼼꼼하게 <일리아스>를 설명한다. 화려한 비주얼로만 각인된 영화(<트로이>) 속의 브래드피트(아킬레스 역)가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어렵게만 다가오던 신화 속 이야기들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과 글로 적어놓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존경스럽다. 이렇게 한 분야에 결실을 맺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노력이 있었을까. 범인(凡人)의 눈으로는 알 수 없는 경이로움이 책의 두께(624페이지)만큼이나 묵직하게 다가온다.

또한 <일리아스>가 갖고 있는 독특한 형식에 대해서도 꼼꼼히 집어준다. 좀 더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어떤 전개방식을 취했고, 어떻게 운율과 장단을 맞췄는지 이야기가 구전되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바탕으로 깊이 있게 설명한다.

사실 <일리아스>도 <심청전>이나 <춘향전>과 같은 우리의 판소리처럼 구전되어 오던 내용을 청중에게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이야기극(노래)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운율과 반복을 통해 전개되는 <일리아스>의 독특한 구조도 충분히 이해되지 싶다.

내용적으로도 실사 영화를 분석하는 것처럼 재미있게 설명한다. 오늘날의 영화나 연극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기법들로 장식되어 있는 <일리아스>도 그렇지만 이를 설명하는 저자의 친절하면서도 실감나는 설명이 인상 깊다. 카메라 앵글에 따라 다른 장면이 연출되듯 다양한 방향으로 서사의 구성을 설명한다.

그래서 단순히 <일리아스>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다양한 문화를 함께 접하게 해준다. 특히 영화나 게임과 같이 판타지나 SF에 관심이 있다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마치 미디어 제작을 위한 스토리라인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일리아스>는 단순한 전쟁사나 신화로 치부해버릴 먼 나라 이야기를 우리 인간들의 이야기로 끌어왔다. 신과 인간, 영웅과 병사의 관계 속에서 미묘하게 뒤엉킨 우리사회를 보여줬다. 어쩌면 <일리아스>를 통해 힘과 권력, 돈과 명예 속에 뒤틀어져버린 인간들의 연결고리를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더라도 변하지 않고 통용되는 이런 범용성이 고전이 갖는 최고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고 영화 <트로이>를 다시 본다. 브레드피트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펼쳐지는 전투 장면은 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물론 <트로이>가 <일리아스>를 많이 왜곡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방대한 원작의 내용을 2시간 안팎의 영상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오류라 생각하면 그리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다. 영화와 원작의 차이점을 하나 둘 찾아보는 것도 <일리아스>를 접하는 또 다른 재미라 싶다.

아울러 이 책의 작가님이 참고하고 인용했다는, "제대로 된 번역을 위해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한" 천병희 님의 <일리아스>도 읽어보고 싶다. 다음에는, 그러니까 그리스 신화와 고대 철학에 좀더 익숙해진 뒤에는 천병희 님의 책과 이 책을 나란히 놓고 읽어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일리아스> 마니아가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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