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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유기농 책벌레들의 독서 대장정

2018 교단수기 공모 은상 수상작

 

아이들이 책을 읽는다. 예전에는 “책 좀 읽어라. 책 좀 읽어라.”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듣지 않던 아이들이었는데 지금은 책 읽는 것이 재미있다고 한다. 한 달에 두 권씩 꼬박꼬박 읽고, 책에서 소개하는 다른 책까지 찾아서 읽고 있다. 도대체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리, 한샘이, 한결이를 만난 건 6년 전이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없어진 물야초등학교 북지분교에서였다. 2011년 누리는 5학년, 한샘이는 3학년, 한결이는 2학년이었다. 전교생이 13명밖에 되지 않아 선생님과 학생들이 한 가족처럼 지내는 아주 작은 규모의 산골분교였다. 누리는 2011년 5학년 때, 한결이와 한샘이는 2014년 5학년과 6학년 때 복식학급의 학생과 담임 선생님으로 만나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북지분교에서 보낸 시간은 4년이었다. 그 사이 누리와 한샘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해서 중학생이 되었고, 한결이가 6학년이 되던 해에 나는 북지분교를 떠나 인근의 다른 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 가족처럼 지내서 인지 자주 연락을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까지 만난 아이들 모두와 오랫동안 연락을 하며 지내는 것은 아니다. 이 아이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샘이를 제외한 누리와 한결이가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누리, 한결이가 학교 다니는 것을 싫어하거나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누리는 어릴 때 소아암을 앓았다. 다행히 완치를 하고 건강을 되찾았지만 어릴 때 아팠던 탓인지 또래에 비해 키도 작았고, 성장도 늦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체력이 약했다. 중학교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따라갈 정도의 체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누리는 한 학기의 짧은 중학교 생활을 접고 자퇴를 한 다음 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홈스쿨링을 선택했다. 다행히 혼자 공부하는 습관이 되어 있어 우리가 독서모임을 시작할 때쯤에는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한 상태였다.

 

또 다른 학교 밖 청소년인 한결이는 중학교 진학 자체를 하지 않고 홈스쿨링을 선택했다. 부모님과 오랜 상의 끝에 한결이는 홈스쿨링으로 자기가 배우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집에서 돼지를 키우는 한결이는 돼지 밥도 주고, 부모님 일도 도와가면서 홈스쿨링을 했다. 세 명의 아이들 중 유일하게 공교육을 받고 있는 한샘이는 누리 동생으로 조용하고 내성적이다. 누리는 한 학기를 다닌 읍내 중학교 대신 소규모의 물야중학교로 진학을 선택했다. 물론 집도 학교 가까이 이사를 했다. 한샘이도 또래에 비해 성장이 조금 늦은 편이었고, 어떤 일을 할 때 정성 들여 하는 습관이 있어 학습 속도도 또래에 비해 느린 편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함께 경쟁하며 생활하는 큰 학교보다는 한명 한명의 학생들을 이해해주는 소규모 학교가 한샘이에게 더 어울린다고 판단한 부모님께서 내린 결정이었다. 

 

홈스쿨링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모님께서 농사일로 바쁜 누리와 한결이에게는 더욱 그랬다. 누리는 열심히 노력한 끝에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지만 한결이는 집안일을 돕는 것 외에는 미래를 위한 어떤 준비도 하고 있지 않았다. 가끔 전화로 “한결아, 뭐 했어?” 하고 물어보면 “그냥 놀았어요.” 이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다. 한결이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누리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한 후 뚜렷한 목표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누리와 한결이를 보면서 이 아이들과 무엇인가를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과 아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만한 것을 생각하다가 독서동아리를 만들어서 책 읽기를 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에게 전화를 해서 의견을 물어봤다. 누리와 한결이 모두 좋다고 했다. 누리의 동생인 한샘이도 하고 싶다는 말에 드디어 우리는 독서동아리 첫 발을 내디뎠다.
 

2016년 7월 첫째 주 토요일, 읍내 카페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카페 한쪽 구석에서 있는 테이블 하나를 차지해서 4명이 모여 앉았다. 차 한 잔씩 주문해서 마시며 그렇게 시작한 첫 모임. 첫 모임에서는 아이들이 부담스럽지 않게 농부시인인 서정홍 시인의 시 몇 편을 준비해 가서 같이 읽었다. ‘닳지 않는 손’, ‘가장 짧은 시’ 등을 읽으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아이들은 서정홍 시인의 시에 공감을 해 주었고, 자신의 생각을 더듬더듬 이야기해 주었다. 왠지 독서동아리가 잘 운영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독서동아리의 이름과 규칙도 정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봉화라는 환경, 아이들의 지금 상황, 책 등을 고려하여 ‘유기농 책벌레들’로 모임 이름을 정했다. 규칙도 정했다. 

 

- 유기농 책벌레들 규칙 -
1. 책은 사서 본다. (용돈을 아껴서)
2. 책은 무조건 읽어 온다. (핑계 대지 않기)
3. 독서모임 하는 날은 점심을 꼭 같이 먹는다. (선생님이 밥값 내기)
4. 모임에 참여를 못 할 시 3일 전까지 선생님께 연락해서 날짜를 바꾼다.
5.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번 한다.
※ 가장 중요한 것은 1번과 2번. 특히 2번은 꼭 지킨다!!!

 

두 번째 모임 약속을 잡았다. 다음 모임 때까지 읽어올 책 ‘생각한다는 건’을 나누어주고 언제까지 읽어올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두껍지 않은 책이라서 그런지 2주 후 토요일로 약속을 잡았다. 장소는 첫 모임 장소인 읍내 카페 구석진 자리. 모임 약속을 잡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근처에 있는 중화요리 음식점에 가서 간단한 점심을 먹으며 서로의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2주일은 금방 흘러갔다. 카페에 들어서니 누리, 한샘이, 한결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저번에 나누어 준 「생각한다는 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돌아가며 말했고, 내가 던진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 했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슬슬 배가 고파 왔다. 11시에 모였으니 점심시간이었다. 다음에 읽어올 책 ‘체 게바라와 여행하는 법’을 나누어주고 다음 모임 약속을 잡았다. 다음 모임도 2주 후! 이번에도 저번에 갔던 중화요리점으로 갔다. ‘뭐 먹을까?’ 고민 없이 모두 자연스러운 발걸음이었다.

 

유기농 책벌레들의 모임이 세 달을 넘어갔다. 여섯 번의 모임을 하는 동안 누리, 한결이, 한샘이에게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책 읽기에 힘이 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책 읽기를 조금 힘들어했었는데 제법 책 읽는 속도도 빨라졌고, 책 내용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우리가 읽고 토론하는 책이 가볍고 쉬운 내용의 책은 아니었기에 아이들의 이런 변화는 무엇보다 반가웠다. 이런 변화와 함께 나도 다른 방법의 독서동아리 활동을 계획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쓰는 작가를 만나게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어떤 작가가 좋을까, 고민하다 청소년 시집 ‘내 짧은 연애 이야기’를 쓴 이묘신 시인을 초청하여 사춘기 청소년들의 고민과 걱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또 이금이 작가의 역사소설 ‘거기, 내가 가면 안돼요?’를 읽고 서울로 이금이 작가를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독서 여행도 다녀왔다. 배낭 하나씩 메고 지난 여름방학 때는 청계천에 있는 전태일 다리와 평화시장을 둘러보는 독서여행을 1박 2일 다녀오기도 하였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난 직후였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합·체’,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모모’, ‘내 짧은 연애이야기’, ‘쓰레기통 잠들다’, ‘생각해 봤어?’, ‘단어장’,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안녕, 베타’,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은 날’ 등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책은 50여 권에 이른다. 처음 모임을 시작할 때는 ‘아이들이 과연 책을 읽어올까?’ 걱정했었는데 지금까지 아이들은 독서동아리 규칙 2번을 정말 잘 지켜왔다.

 

아이들의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다. 누리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했고, 지난 3월부터 디자인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사이버대학교를 다니고 있다. 한결이도 지난 6월 중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했다. 고등학교는 진학을 해서 친구들을 사귀고 싶다고 한다. 한샘이는 조금 더 큰 학교에서 친구들과 경쟁하고 싶다며 지금은 고등학교 진학 공부를 하며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의 이런 변화가 흐뭇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독서동아리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만큼 아이들이 자란 덕분일 것이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우리가 함께 읽은 책이 작은 도움이라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지금도 우리는 ‘함께’ 책을 읽고 있다. 책 읽는 시간이 즐겁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겁다.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더 즐거운 일이다. 그 즐거움 속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목표를 세웠다. 2018년 1월에 있을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다. 그것을 목표로 요즘은 역사책을 함께 읽고 있다. 방대한 역사를 짧은 시간에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 독서동아리의 이름이 무엇인가. 유기농 책벌레들! 느리지만 목표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애벌레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우리는 ‘함께’ 책을 읽으며 함께 성장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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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교단수기 공모 은상 수상작-수상 소감] 교실이자 선생님이 돼 준 책벌레들

 

책이 좋았다. 책에서 풍겨오는 냄새가 좋았고, 책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은 바라만 봐도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아이들을 책과 친해지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교직에 들어서면서부터 지금까지 노력은 하고 있지만, 15년이 지나도록 확실한 방법을 한 가지도 찾지 못했다. 혼자만의 책 읽기를 즐기던 중 우연한 기회에 처음으로 독서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께 책을 읽어준 유기농 책벌레 세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많은 것을 배웠다. 학교와 교실을 떠나서, 교사와 학생의 입장을 떠나서 책을 통해서 우리는 만났고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책을 통해서 서로를 지켜볼 수 있었고, 서로의 성장을 응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함께 하는 책 읽기의 행복을 느끼게 해준 유기농 책벌레들! 함께한 시간만큼은 너희가 나의 교실이 되어 주었고, 선생님이 되어 주었다. 함께 읽은 책처럼 성장하길, 함께 읽은 책과 같은 사람이 되길…. 고맙고 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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