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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와 구렁이

60년도 더 지난 얘기지만, 초등학교 3학년에서 5학년 때까지의 일들이 머릿속에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만 그런가 했는데, 그 무렵 일들을 제일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친구들이 많다. 아마도 아이들에게 있어서 이 시기가 학습능력은 물론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이나 건강한 몸과 마음을 기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해방된 다음 해,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한 나는 김제와 고창을 거쳐 결국 전주에서 졸업을 했다. 교육자인 아버지를 따라 여섯 가족이 함께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네 번을 옮겨 다니는 동안 가장 오래 머문 학교가 고창국민학교다. 거기 있던 3년 남짓한 동안에 전쟁을 치러야 했다. 겨우 여남은 살밖에 먹지 않은 아이가 무슨 전쟁을 겪었겠는가 생각할지 모르지만, 매일 밤마다 마을 어귀의 논두렁에 파놓은 구멍에 들어가서 죽창을 들고 실제로 보초를 섰으니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해방 때는 미군 지프차 뒤를 쫓아다니며 껌이며 초콜릿을 받아먹었고, 6·25 때는 소련군이 타고 들어오는 지프차를 향해서 누군가 마을사람이 손에 쥐여준 인공기를 흔들기도 했다. 전쟁 통에는 정말 별의별 일들을 다 보고 겪었지만, 그런 얘기 듣고 싶어 할 사람 없을 테니까 여기선 접어두기로 한다.
고창으로 이사를 오기 전에 살았던 곳에서는 돈을 주고 물을 사 마신다는 얘기를 해도 애들이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아서, 선생님에게 몰려가 수돗물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던 적도 있다. 심이 까칠해서 잘 써지지도 않는 연필은 종이를 찢어먹기 일쑤였고, 잘못 쓴 글자를 지우려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조금만 문질러도 누런 종이 공책은 금세 구멍이 뚫리곤 했다.
여름철에는 ‘퇴비 증산운동’이라는 것이 있어서, 풀을 베어 등에 한 짐씩 짊어지고 낑낑대며 학교에 가야 했다. 지금도 TV에서 개미들이 저보다 큰 나뭇잎을 잘라 물고 줄지어 가는 장면을 보면 그때 일이 생각난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지어 나른 풀들이 모두 어떻게 쓰였는지 궁금하다.

200년 된 구렁이
시계 중에서도 제일 정확한 것이 배꼽시계다. 점심이라고 해 봤자 납작한 알루미늄 도시락에 근처 밭둑이나 길가에서 뜯어온 쑥에다가 약간의 꽁보리를 섞은 죽처럼 생긴 밥과 참기름에 볶은 소금반찬이 전부였지만, 점심시간은 왜 그렇게 기다려졌는지. 아버지가 중학교 교장선생님이어서 나는 그래도 형편이 조금 나은 편이었다. 우리 반에는 그런 도시락도 못 가져와서 점심시간만 되면 교실 밖으로 나가는 애들이 여럿 있었다.
지금의 북한이 아마 그럴까, 거기서는 아직도 하얀 ‘이팝’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인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고창국민학교의 운동장은 항상 눈부시고 따뜻했다. 하지만 딱 한 군데 가까이 가기 싫은 장소가 있었다. 운동장 한비짝(한쪽, 한켠의 전라도 지방 방언)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 밑동에 뚫린 시커먼 구멍 속에는 200년 묵은 흰 구렁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동네 강아지쯤은 한입에 먹어 치운다고 했다.
그때는 학생 수가 많지 않아서 남녀가 한 교실에서 공부했다. 아무리 전쟁 통이라고는 해도 미묘한 시기라서 여자애들 앞에서 괜히 심술을 부리는 녀석이 있기 마련이었는데, 그 녀석들도 어둑할 무렵만 되면 슬금슬금 느티나무를 피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이라고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어두운 하늘에 거인처럼 팔을 뻗치고 서 있던 느티나무와 그 음침한 구멍 안에서 사는 흰 구렁이다.

아이들은 놀이의 천재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노는 일에는 모두 천재였다. 항상 배가 고팠지만, 사시사철 놀 거리가 없어서 심심하거나 시간이 남아돌던 때는 없었다. 종이(산수 책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를 접어서 만든 딱지치기는 기본, 새끼줄을 둥글게 만 공으로 운동장을 누비는 축구, 못 치기, 땅 따먹기, 실은 공깃돌과 소꿉놀이도 조금은 해봤다. 산에 가면 철마다 먹을 것 천지였다. 부드러운 삐삐, 달콤한 찔레 순, 물오른 소나무의 연한 껍질……. 학교가 파하고 나면 동무들과 근처 야산에 올라가서 새집을 뒤져서 알도 꺼내 먹고, 이른 봄에는 보리 서리에 콩 서리도 거르지 않았다. 하루에 몇 차례씩 기차가 지나다니는 정읍이 삼십 리쯤 떨어져 있었는데,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도 멀리서 ‘삐익’ 하고 기적이 울리면 모두 전기를 맞은 것처럼 꼼짝 안 하고 멈춰 서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 먹을 것뿐인가. 매미와 말잠자리, 풍뎅이, 딱정벌레, 하늘소, 여치, 땅강아지, 벼메뚜기에 송장메뚜기, 무당벌레, 사마귀, 송사리, 고동, 개구리, 물방개……. 산이고 들판이고 물속이고 장난감 천지였다. 어른들 눈에는 착하고 귀엽게 보일지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어딘가 잔인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고추잠자리를 잡아서 꽁지를 잘라내고 거기에 강아지풀을 꽂아서 날려 보내는 것도 재밌는 놀이었다. 얇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안간힘을 써보지만 무거워서 날지 못하는 불쌍한 고추잠자리. 때로는 개구리나 방아깨비가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그 뒤로도 그런 잔인한 놀이가 줄곧 이어졌더라면 지금쯤 내가 어떤 성격을 가지게 되었을지, 생각하면 두려움이 생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못된 장난을 두 번 다시 할 수 없게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인자하신 선생님과 잔인한 아이들
한 번은 점심시간에 몇몇 악동들과 운동장에 나가 연필통에 넣어온 풍뎅이를 꺼내어 재주를 보기로 했다. 풍뎅이 머리를 비틀고 땅 위에 뒤집어서 눕혀놓으면 완전히 지칠 때까지 필사적으로 날개를 붕붕거리며 그 자리를 빙글빙글 맴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손뼉을 치며 깔깔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천둥 같은 목소리에 우리는 그 자리에서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고 말았다. 담임선생님이었다. 정말 죄송한 얘기지만 키가 작고 둥근 얼굴에 둥근테 안경을 썼다는 것 말고는 선생님 성함이 아무래도 생각이 안 난다.
전쟁이 막 끝나고 큰 도회에서 전근을 오신 선생님은 항상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를 가르치셨다. 그 선생님을 따라서 난생 처음 교회에 가서 유년주일학교라는 것도 다녀보았다. 선생님은 성가대에서 멋진 목소리로 노래도 불렀고, 아이들에게 성경에 관한 얘기도 해주셨다. 어떤 날은 점심을 가져오지 못한 아이를 교실 밖으로 조용히 불러서 삶은 고구마를 나눠주는 것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인자하신 선생님이 터질 듯 새빨간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더듬거릴 정도로 화를 내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선생님이 왜 그처럼 화를 내시는지 영문을 몰랐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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