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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비움’의 미학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에 맞서 똑같이 대응하면 싸움의 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렇다고 욕을 먹으면서 끝까지 참을 수만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我若被人罵, 佯聾不分說.” 상대가 욕하면 이를 못 알아듣는 귀머거리처럼 행동하라고 권하는 명심보감 계성편의 가르침을 들어보자.


자아를 텅 비워 타인과 갈등의 소지를 없애려는 달관의 인생 태도는 선불교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근대 일본의 대표적 의승(醫僧)이었던 하라 탄잔(原 坦山) 이야기가 유명하다. 탄잔이 다른 승려와 한 개울가에 이르렀을 때 어떤 처녀가 불어난 물을 건너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었다. 탄잔이 선뜻 처녀를 들쳐 업고 개울을 건너 주었다. 한참을 함께 걷던 다른 승려가 탄잔에게 어찌 승려 신분으로 처녀를 업을 수 있었느냐 힐난했다. 그러자 탄잔이 말했다.
“이보게, 난 이미 처녀를 내려놨네만 자넨 아직도 안고 있었나?”
흔히 한국의 경허(鏡虛) 스님 고사로 잘못 알려져 있는 일화다. 처녀를 붙잡아두려는 마음의 집착이 없다면 처녀는 이미 내 삶에서 떠난 것이다. 탄잔의 마음은 마치 텅 빈 배처럼 처녀를 실어 건너편에 내려주고 도로 비어버렸다. 그 안에 처녀는 없었다. 처녀를 마음에 간직하고 괴로워한 건 다른 승려였다. 그는 집착의 마음으로 그녀를 자기 안에 옭아맨 채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탄잔을 질투하여 화가 나 있었다. 허나 탄잔의 마음속에 그녀는 이미 없었고 그는 그저 고요한 빈 배로 세상을 떠돌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원문】 我若被人罵, 佯聾不分說, 譬如火燒空, 不救自然滅, 鎭火亦如是, 有物遭他熱, 我心等虛空, 摠爾飜脣舌. 『明心寶鑑』「戒性篇」
【번역문】 내가 만약 남에게 욕을 먹는다면, 귀먹은 척하며 따지지 말자, 공기를 태우는 불길에 비유해보면, 애써 끄려하지 않아도 저절로 꺼지는 것과 같나니, 화 가라앉히는 법이 또한 이러하여, 탈 물건 남아있다면 다른 불길과 만나게 되리, 내 마음이 허공과 같아질 때, 이 모든 일 입술과 혀 놀리는 짓이될 뿐. 『명심보감』「계성편」

누군가 자기에게 욕을 한다면 발끈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얼마나 참을 수 있느냐가 유일한 관건이다. 그때 끝까지 참을 수 있을까? 말은 행동과 달리 당장 내 목숨에 위해를 가하진 않는다. 조금만 더 참다보면 별일 아닐 수도 있을 텐데, 한 순간의 격정을 이기지 못해 사소한 말싸움이 끔찍한 다툼으로 비화된다. 이 과정을 초기에 차단할 순 없을까? 인용문에서는 상대가 욕을 하면 이를 못 알아듣는 귀머거리처럼 행동하라고 권한다. 상대의 분노와 모욕이 처음엔 불같이 드셀지 모르지만 귀를 막고 무시하다보면 마치 공기를 다 태우고 저절로 꺼지는 불길처럼 마침내 잦아들 것이다. 공기를 태우는 불길은 땔감이 없는 한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욕먹는 내 마음을 공기로 만들어야 한다! 마음을 텅 빈 공간으로 만들면 불은 찾아들었다가도 이내 풀이 죽어 소멸한다.
화내고 있는 사람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대응하는 것은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 땔감을 던져 넣는것과 같다. 욕에 맞서려는 나의 말들은 성내는 자들에겐 요긴한 불쏘시개가 된다. 그들은 더욱 치열하게 분노하며 화를 키워갈 것이며 그에 대한 나의 대응도 더 강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욕하며 성내는 상대방에게 같은 방식으로 대항하는 것은 결국 상대방으로부터 시작된 불길을 내 몸에 옮겨 붙이는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음을 텅 빈 공간으로 비워두면 불은 공기만을 태우고 빨리 진화된다. 허공으로 변한 내 마음의 관점에선 욕하는 상대방의 목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 묵음으로 처리된 텔레비전 화면처럼 상대방의 입술과 혀만 바삐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무성영화 주인공이 자막 없이 떠드는 꼴이란 얼마나 우스운가! 그럴 때 우리는 우리를 욕하는 사람을 향해 부드럽게 웃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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