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조선 왕릉 답사는 조금 독특하다. 느긋함과 긴장감이 번갈아들기 때문이다. 왕릉은 숲이 있고 왕릉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능침공간이며 제향 공간이 자연의 모습과 잘 어울려 구성하고 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가치인 오랜 전통 속에서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과 별개로 공간 구성이 아름다워 ‘신의 정원’으로 부르기도 한다. 왕릉 답사는 다른 역사 유적과 달리 천천히 걸으며 즐길 수 있으니 느긋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긴장감이 생기는 이유는 무덤의 주인공, 곧 왕과 왕비에 대해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한 인물, 그것도 왕이나 왕비였던 이의 일생을 논하기 좋은 곳이 무덤이긴 한데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더해 어떤 공간에 이야깃거리가 생기면 조금 더 흥미가 당기는 경우도 있다. 바로 서오릉이 그렇다. 서오릉은 한양 서쪽, 고양의 다섯 개의 왕릉이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고양의 서삼릉이며 구리의 동구릉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 이름이 생겼다. 한 구역에 다섯 개의 왕릉이니 특정한 이야기를 상정하기에 어려움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 다섯 왕릉이 예종과 안순왕후의 창릉,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의 경릉, 영조비 정성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선덕여왕은 죽음이 임박하자 신하들에게 자신의 무덤을 ‘도리천(忉利天)’에 묻어달라고 했다. 도리천은 불교에 나오는 여러 하늘 가운데 하나다. 그런 곳이 지상, 신라에 있을 리가 만무한데 그런 부탁을 하니 신하들은 당연히 그 장소를 다시 왕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그 장소를 ‘낭산 남쪽’이라고 얘기한다. 낭산은 황룡사 옆의 나지막한 산. 신하들은 낭산 남쪽이 도리천인지 의심이 갔지만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든다. 이야기는 문무왕 때로 이어진다. 신라가 당과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자 당은 신라마저 정복할 계획을 세운다. 이 사실을 당에서 유학하던 의상대사가 알아채고 급하게 귀국해 문무왕에게 알린다. 당이 50만 군사를 동원해 신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자 왕을 비롯해 신라는 대비책을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한다. 이때 적을 물리치는 비법을 가지고 온 명랑스님에게 이 일을 부탁하자는 의견이 나온다. 이에 명랑스님을 불러 계책을 물으니 ‘낭산 남쪽에 신유림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되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절을 지으려고 하는데 이미 당나라 군대가 바다
2015년에 새로운 세계유산 하나가 추가됐다. 바로 ‘백제역사유적지구’로 공주, 부여, 익산의 8개 고고학 유적(공주: 송산리고분군·공산성, 부여: 관북리 유적·부소산성·능산리고분군·부여나성, 익산: 미륵사지·왕궁리 유적)이 여기에 해당한다. 덕분에 사람들은 다시 백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이들 유적에 대한 유명세가 모두 같지는 않아 보인다. 무령왕릉이 포함된 송산리고분군이나 무왕이 지은 미륵사지, 그리고 5층 석탑이 있는 정림사지처럼 유명한 곳도 있지만 조금 덜 알려진 곳도 있다. 관북리 유적이나 부여나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무래도 이들 유적은 무령왕릉처럼 화려한 유물이나 절터의 탑처럼 눈에 띄는 지상의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부여에 답사 온 사람들도 놓치기 쉽다. 그렇지만 역사 유적도 사람을 보는 것과 같아서 모두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잠시 눈을 돌려 관북리 유적과 부여나성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이전과 다른 부여, 그러니까 사비도성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여 답사를 하기 전에 잠시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같은 도읍지인 부여와 경주의 직접 비교는 조금 곤란한 면이 있다는 점이다. 경주의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