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 구석의 목소리에서 시작된 물음 체육교사로서 운동장 라인을 그리고, 공을 챙기며, 아이들과 부대끼는 삶은 늘 역동적이고 보람차지만,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에 무거운 숙제를 안고 있는 듯한 부채감이 존재해 왔다. 학기 초가 되면 어김없이 마주하게 되는 체육관 구석의 두려운 눈빛들 때문이다. “선생님, 어차피 운동 신경은 타고나는 거 아닌가요? 전 원래 몸치예요. 체육시간은 잘하는 애들만 신나는 시간인데, 굳이 힘들게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땀을 흘려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학생건강체력평가(PAPS)를 측정하는 날이면 고개를 숙인 채 위축되어 있던 아이들, 팀 스포츠 경기가 시작되면 실수하여 팀에 피해를 주지는 않을지, 공이 자기에게 오면 어쩌나 두려움에 눈을 피하던 아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한국 체육교육이 기능 중심, 교사 주도의 서열화된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아픈 단면이다. 팬데믹 이후 급격하게 확산된 비대면 문화는 아이들에게서 대면 소통과 협력의 기회를 앗아갔고, 이는 고스란히 학교 현장에서 신체 능력 저하와 사회적 고립, 정서적 불안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어 ‘자기주도성
‘딸깍’ AI 시대, 우리에게 ‘질문하는 연습’이 필요한 이유 “선생님, 그래서 정답이 뭐예요?” 교실에서 가장 흔히 들리는 질문 중 하나이다. “정해진 정답은 없으니 자유롭게 생각을 이야기해 보자”고 격려해도, 학생들은 여전히 교사의 입만 바라보며 ‘정해진 답’을 기다린다.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누구나 손가락 클릭 한 번, 이른바 ‘딸깍’하는 것만으로 AI 광고, AI 뉴스, 심지어 AI 책까지 손쉽게 만들어 내는 환경이 되었다. 이처럼 정보가 범람하는 환경 속에서 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편리하게 답을 찾아내고 있다. 하지만 AI가 제공한 정보가 정확한지, 다른 관점은 없는지, 혹은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깊이 고민하는 과정은 점차 옅어지고 있다. AI 시대, 이제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답을 외우는 능력이 아니라 올바른 정보를 판별하고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질문하는 연습’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발맞추어 우리 학교는 올해 ‘질문하는 학교’로 선정되었다. 학생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비판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도록, 교실 안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시작하고 있다. 아몬드와 함께한 비경쟁 독서토
학교폭력 사안을 처리한 교사가 갑자기 아동학대로 신고되고, 교육활동 침해를 호소해 교권보호위원회를 신청한 뒤 다시 고소를 당한다. 한 번의 신고가 혐의없음으로 끝나도 항고와 재정신청, 다른 혐의를 덧붙인 고소가 이어진다. 그사이 교사는 수업을 멈추고 진술서를 쓰며, 병가를 내고 변호사를 찾아다닌다. 필자가 국회 토론회를 준비하며 보도자료를 분석한 결과, 2021년 이후 확인된 사건만 중복을 제외하고 15건이었다. 학교폭력 처리와 연동된 사례가 10건, 교권보호 절차 개시 뒤 신고가 제기된 사례가 9건이며, 두 유형이 겹친 사건도 4건이었다. 이는 공식 통계가 아니라 보도자료들로 선후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최소 사건군이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2023년 9월부터 2026년 2월까지 교원을 대상으로 한 아동학대 신고는 1,870건이었다. 이 가운데 수사가 종결된 993건의 90.4%(898건)가 입건 전 종결·혐의없음·불기소로 마무리됐다. 물론 무혐의가 곧 허위신고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아동을 보호하고 선의의 신고를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신고 가능성이 학교폭력 조치나 정당한 생활지도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작동하는 문제까지 외
보수화와 극우화는 같은 말이 아니다 진보를 표방한 교육감이 또다시 다수 당선됐다. 그런데 정작 그 ‘진보교육’을 받고 자란 10대와 20대에게서는 보수화, 더러 극우적 정서까지 번진다는 진단이 나온다. 동의한다. 다만 ‘보수화’와 ‘극우화’라는 두 단어부터 갈라 보고 싶다. 뭉뚱그리면 진단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먼저 질문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진보교육을 받은 세대라면 진보 성향을 띠어야 한다’는 전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시민교육의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특정 성향을 심어 주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주입이며, 진보가 주입의 방식으로 전수된다면 그것은 이미 진보가 아니다. 시민의 정치적 성향은 교육감이 몇 해 재임했느냐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회가 놓인 사회경제적 조건, 그리고 그 조건에 대해 누가 더 설득력 있는 비전을 내놓고 공감을 얻어내느냐에 따라 형성된다. 교육감에게는 애초에 진보의 비중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릴 권한도 능력도 없다. 다만 기대를 꺾는 것은 일정 부분 가능한 것 같다. 어떤 학생이 보수적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면,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작은 정부와 시장, 개인의 책임과 전통을 중시하는 입장은 진보와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10만㎞ 현장 누빈 3년, 학교안전의 답을 찾다 정훈 학교안전공제중앙회 이사장의 지난 3년을 관통한 단어는 ‘현장’이다. 전국의 학교와 학생안전체험관, 시도교육청과 학교안전공제회, 대학과 재외한국학교를 직접 찾아 학생과 교직원, 교육 관계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학교안전의 해답을 찾아왔다. 정 이사장이 이동한 거리는 지구 두 바퀴 반에 해당하는 약 10만㎞에 이른다. 이 기간 동안 200여 개 기관을 방문해 4천여 명의 현장 관계자들과 소통했다. 취임 3주년을 맞아 발간한 멈추지 않는 열정에는 이처럼 쉼 없이 현장을 누비며 학교안전의 변화를 만들어 온 지난 3년의 기록이 담겼다. 학교안전공제중앙회(이하 공제중앙회, 이사장 정훈)는 「학교안전사고 예방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설립된 학교안전 전문기관이다. 전국의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과 재외한국학교까지 아우르며, 학교안전사고 예방과 보상, 안전교육, 조사·연구 등 교육현장의 안전망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30여 년간 대학교수와 부총장·명예총장 등을 역임한 정 이사장은 2023년 5월 취임 이후 공제중앙회의 역할을 사고 발생 이후의 보상에 머무르지 않고 예방과 교육,
질문하는 인간 학문(學問)의 출발점은 글자 그대로 질문(問)이다. 우리 인간은 원래 호기심이 많은 동물이다. 두 살배기 손자는 온종일 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지구에 이사 온 지 2년을 갓 넘겼으니 접하는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하고 궁금할 것이다. 인간은 원래 호기심이 많고, 질문하기를 좋아하며, 탐구를 즐기는 호모 퀘스티오스(Homoquestius)이다. 학습은 바로 이러한 뇌의 구조와 본능에 부합할 때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인간은 본래 질문하는 존재이지만 좋은 질문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의 “왜?”가 처음에는 단순한 놀라움의 표현이라면, 성장 하면서의 질문은 점차 비교하고, 연결하고, 의심하고, 재구성하는 수준으로 깊어진다. 호기심이 질문의 불씨라면 이 불씨를 키우는 땔감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지식과 경험이다. 머릿속에 축적된 개념과 경험, 언어와 정보가 풍부할수록 질문은 더 정확하고 깊어지며 창의적으로 확장된다. 질문하는 능력은 타고난 호기심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지적 토대가 갖춰질 때 제대로 자라난다.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역량의 하나가 질문하는 능력이라
프롤로그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지리 교사로서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장소 중 하나였다.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많은 지리 교과서에 실려 있는 그 사진이었다. 지면을 뚫고 치솟는 거대한 물기둥, 올드 페이스풀(Old Faithful) 간헐천의 그 장면은 어린 시절부터 ‘언젠가는 직접 보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으로 남아 있었다. 지구가 살아 숨 쉰다는 것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눈앞에서 체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여행의 첫 번째 동기가 되었다. 또 다른 이유는 이 장소 자체가 갖는 의미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1872년에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옐로스톤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자연보전이라는 철학이 처음으로 법제화된 장소이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자연유산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연을 개발과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시대에 이 땅만큼은 있는 그대로 보존하겠다는 결단이 어떤 풍경을 만들어 냈는지, 두 발로 걸으며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을 결정적으로 이끈 것은 아이들을 위한 주니어 레인저(Junior Ranger) 프로그램 워크북의 존재였다. 옐로스톤을 방문하기 전후로 꾸준히 접해 온 이 프로그램은 교육자로서 큰 영감
올여름 전 세계 영화팬들이 가장 기다리는 영화 중 한 편은 누가 뭐라 해도 오디세이(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임에 틀림없다. 고대 그리스신화의 정수이자 현대 문학의 근간이 된 호메로스의 고전 오디세이아에서 트로이 전쟁부터 함락 이후 오디세우스가 10년 동안 미지의 세계를 거쳐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을 웅장하고 장대한 서사시로 스크린에 그려냈다. 이번 ‘시네마 톡톡톡’에서는 천재 감독이라 불리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포인트들과 함께, 그리스신화를 다룬 영화들도 함께 복습해 본다. 609km 분량 IMAX 필름에 담은 이탈리아·스코틀랜드의 광활한 자연 “영화감독으로서 아직 채워지지 않은 영화적 영역,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것들을 늘 찾게 된다. 내가 자라면서 봐온 수많은 신화적 영화가 있었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예산과 IMAX 스케일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게감과 진정성으로 구현된 신화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오디세이는 거대한 이야기이고, 정말 흥미로운 도전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영화로 만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놀란 감독이 누구던가! 5분마다 기억을 잃는 남자가 아내의 복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거주형태, ‘전세’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거주 형태가 있다. 바로 매매·전세·월세다. 매매와 월세는 다른 나라에도 존재하지만, 전세는 매우 드문 형태이며 사실상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독특한 제도다. 외국인들에게 전세 제도를 설명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낯선 개념이지만, 전세는 수십 년 동안 우리 주택시장에 계속 남아있었다. 또한 만기 때 보증금을 고스란히 돌려받을 수 있으니 사회초년생 입장에서는 주거비를 낮추는 동시에 자산 형성의 종잣돈을 모으는 경로로 많이 활용됐다. 이토록 특이한 임차 형태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과거 고도 성장기와 고금리 시절, 집주인에게 전세 보증금은 은행 대출보다 저렴하고 유용한 ‘무이자 사적 금융’이었다. 이를 통해 집주인은 자산을 증식하거나 또 다른 부동산에 투자할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세입자 역시 매달 생돈이 나가는 월세를 아껴 자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즉 전세는 집주인도 세입자도 모두 만족한 공생의 산물이다. 전세는 시장의 공급과 수요를 매끄럽게 잇는 윤활유 세입자가 이처럼 매달 나가는 고정 주거비 없이 자산을 축적하는 동안
사고외주 (홍진기 지음, 어크로스 펴냄, 152쪽, 1만 5,000원) 편리함을 이유로 생각하는 과정 자체를 AI에게 넘겨주는 ‘사고외주(思考外注)’ 현상을 짚는다. 대학 교수인 저자는 강의실에서 마주한 학생들의 매끄러운 보고서에서 고민과 망설임 등 사람 냄새가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우리가 ‘똑똑한 무능함’에 빠져들고 있다고 경고한다. 질문을 던지고 상충하는 정보를 비교하며 논리를 다듬는 비효율적인 시간이야말로 인간의 판단력을 키우는 핵심임을 역설하며, 사유의 주도권을 되찾아올 것을 제안한다. 신화의 역사 (심용환 지음, 민음사 펴냄, 정보 없음, 1만 9,000원) 신화를 흥밋거리 정도로 소비하는 경향을 지적하며, 수천 년간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온 역사적 산물로서의 가치를 조명한다. 그리스신화의 시작부터 북유럽과 이집트, 그리고 중국에 이르기까지 각 문명이 시대의 위기와 욕망을 어떻게 신화화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저자는 아이돌 숭배, 팬덤 정치, 음모론 등을 새로운 형태의 신화로 평가하며, 인간에게 거대 서사로서 신화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읽지 않는 사람들 (나오미 배런 지음, 전병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412쪽, 2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