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가장 쉬웠다’거나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
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나이를 먹다보니, 이제는 그 말들의 의미를 조금 알 것도 같다. 공부만큼 정직한 게 없기 때문에, 세상에 이러 저리 부딪히며 살다보면 공부만큼 뿌린 데로 거둬지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가 즐겁고 행복하다’고 감히 말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서울대 명예교수(70·물리학박사)이자 교수신문이 2003년 선정한 현대 한국의 자생이론가 20명 중에 유일한 자연과학자로 선정되기도 했던 저자는 “그저 앎을 즐기고 앎과 함께 뛰노는 것이 좋았다”고 단언한다. 어떤 목표나 당위가 필요치도 않고, 끝이 없어야 배우는 기쁨, 깨닫는 즐거움도 계속되며, 그 보물창고로 향하는 과정, 공부로 가는 그 길이 행복하다고 말이다.
그는 스스로를 공부꾼이라고도 했고, 때로는 앎을 훔쳐내는 학문도둑이라고도 했다. 땅이나 일구라는 할아버지의 반대로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던 그의 ‘공부’는 그렇게 ‘도둑’의 심정으로 시작됐다. 그의 공부 방식은 호기심과 의문이었다.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끝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야생의 기질을 견지했다는 것이다.
또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겨냥한 수학공식 외우기보다 원초적 과학 체험을 더 선호했다. 그는 스스로 터득하는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그의 공부는 자기주도형 학습태도와 방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득점 경쟁으로 치달으면 학습의욕과 학업능력을 잃게 되고, 그리고 이것이 조금 길게 누적된다면 결국 능력 부족으로 득점 수치도 올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스승의 스승인 아인슈타인과 스승인 캘러웨이 교수로부터 나에게까지 보이지 않는 독특한 학문적 성향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첫째는 교육에서 거의 완전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우리에 넣어 기르는 게 아니라 야생으로 내놓고 키운 것이라 할 수 있다.…또 하나의 특징은 이른바 ‘전문분야’라는 것을 스스로 설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제나 새 분야에 관심을 돌릴 수 있고, 또 관심이 쏠리기만 하면 얼마든지 넘나들었다.”
그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통섭’보다 훨씬 앞서 이미 학제 간 통합적 연구를 수행했다. 자연과학자이면서도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그의 주요한 연구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그가 제기하는 ‘앎 중심 학문’에서 ‘삶 중심 학문’으로의 전환은 이러한 아우름 속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이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전하는 인생과 학문의 이야기는 학생들은 물론 교사, 학문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까지 ‘공부는 왜 하는가’ ‘그 공부는 또 어떤 공부여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져준다.
“빨리 올라가 멋진 조망을 보고 남이 오르지 못한 새 봉우리에 첫발을 디뎠다는 영예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목적으로 해선 안 된다. 길게 보면 이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소진시켜 더는 진전을 어렵게 하고, 성급한 나머지 발을 잘못 디뎌 다칠 위험을
가중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