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간의 고교 평준화 제도가 어린 학생에게 입시지옥을 강요했던 일류고를 폐지시켜 사람들의 속을 후련하게 해주기는 했지만 무긴장, 무경쟁의 학교문화를 형성하는데 일조했다."
문용린 서울대 교수(전 교육부장관)는 26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개원 10주년 기념 '21세기 학교교육 선진화 방안 모색을 위한 국제학술세미나'에 앞서 배포한 '한국교육 60년과 발전과제'라는 주제발표문에서 지난 35년 동안 이어져온 고교 평준화 제도의 문제점을 신랄히 비판했다.
문 교수는 한국교육 60년을 평준화 이전 시기 25년(1948-1973)과 평준화 이후 시기 35년(1973-2008)으로 구분해 교육의 질적 개선을 위한 노력과 경쟁이 왜 어떤 양태로 비활성화의 길을 걸어왔는지 분석했다.
평준화 이전 시기에는 학교간에 경쟁이 팽팽히 존재해 경쟁력이 있는 학교와 없는 학교의 구분이 생겼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경쟁력 있는 학교에 진학하길 희망했고 교사들도 그런 학교에 근무하길 원했다는 것이다.
이런 학교간의 경쟁 덕분에 교사들은 경쟁적으로 학생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밖에 없어 학생과 학부모들은 학교와 교사를 신뢰하게 되고 학교밖의 사교육에 별로 눈을 돌리지 않아도 됐었다는 게 그의 평가다.
문 교수는 "비록 이 시기의 경쟁이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지도 경쟁이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분명히 학교 간에, 교사 간에 잘 가르치기 위한 경쟁이 있었고, 교육계 내부에 잘 가르치기 위한 활력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평준화 시기에 접어들면서 학교 간의 경쟁이 사라지게 됐다는 것이다.
입학생들이 강제배정됨으로써 좋은 신입생을 받기 위한 학교 간의 경쟁이 무의미해지면서 학교의 긴장이 해이해져 학교에 '무긴장 무경쟁'의 분위기가 팽배해졌다는 해석이다.
문 교수는 "설립이래 수십년 동안 고유한 전통과 특색을 유지했던 유명 공사립 고교들이 일거에 특색을 잃고 그저 '한 학교'로 일컬어 지게 되는 것을 평준화 시기에 수도 없이 목격했다"며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그저 '한 학교'로 존재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면 왜 힘들게 노력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결국 고교 평준화 정책은 35년간 장수하면서 한국의 학교교육이 시대정신에 맞게 변모할 기회를 억압하고 차단했다는 것이다.
학교간 선의의 경쟁이 없어지면서 학교가 기대와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게 되자 학생과 학부모들은 학교 밖에서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사교육을 찾게 됐다고 문 교수는 해석했다.
그는 이러한 진단을 바탕으로 고교평준화 정책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안으로 '다양한 형태의 고교교육 추구'를 꼽았다.
이는 공부 잘하는 학생을 찾아 육성하기 보다는 학생들이 각자의 고유한 소질, 적성, 능력을 다채롭게 개발해 자기 방식대로의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문 교수는 ▲학교의 교과목 총점 성적이라는 획일적인 잣대가 아니라 다양한 기준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다양한 목적을 가진 고교를 보다 많이 세우고 ▲교과목 성적이외에 다양한 잠재 능력이 대학에서 육성될 수 있도록 대학의 무전공 선택입학 또는 자유전공입학을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학생들의 기초학력 확보를 학교나 교육청의 평가에 가장 중요한 경쟁력 요소로 삼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 교수는 "21세기 사회는 우수한 사람만이 아니라 자기 능력만큼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가 될 것"이라며 "우수한 사람은 우수한 대로 교육하고 못난 사람은 못난 사람대로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