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완전히 멸망하자 나당 연합군은 약속대로 그 창끝을 고구려로 향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 장군의 막부정치로 강성함이 유지되었으나, 그가 임종을 맞을 즈음에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세 아들을 모아놓고 화살 3개를 주며, “이를 분질러 보아라”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이를 꺾지 못하자, 하나씩 주면서 다시 꺾으라고 하였다. 이에 세 아들이 하나씩 화살을 꺾자, “내가 죽으면 우리 고구려의 운명은 이 화살과도 같을 것이다. 너희 셋이 힘을 합치면 고구려는 유지 될 것이고 흩어지면 망할 것이니 부디 명심하여 잊지 말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세 아들은 서로 권력을 잡으려고 다투다가, 결국은 장남 남생은 신라로 투항하고 두동생도 역시 갈등해 힘을 분산시킴으로써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668년 9월, 700백년을 이어온 긍지 높은 고구려의 기상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웅장했던 기마민족의 영광! 영웅스럽기까지 하던 우리 민족의 만주사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지워져가는 비통한 순간이었다. 이로써 6000년 전 인류 최초의 홍산문명을 만들어 대륙을 누비던 기마민족은 여기에서 그 빛을 잃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고대에 늘 중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만리장성까지 쌓게 만든 주인공인 기마민족 동이족(東夷族)은 고대부터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으나, 이 모든 것이 중국화되는 비운을 맞게 되니, 이는 실로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의 시간이었다. 이로써 만주에 사는 고구려인들을 우리는 여진이라 부르고, 후에는 만주족이라 해 타민족으로 백안시하는 역사를 꾸몄으니,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아-, 통탄할 일이로다. 이렇듯 몇 명의 어리석은 자들에 의해 민족의 역사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역사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다.
졸지에 난민이 된 고구려 왕족의 일부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약광(若光)일행이 처음 도착한 지명이 지금도 오이소(大磯)로 남아있고, 그들이 도래해 개척한 땅이 지금 일본의 수도․도쿄(東京)라니 참으로 묘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백제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은 우호적이다. 지금도 전라도를 좋아하고 북한정권은 미워해도 북한주민은 미워하지 않는다. 이것도 피의 유전인가? 그런데 엄밀히 따져보면 신라가 혈통적으로는 더 가까운 것 아닐까…?
한편, 고구려가 망하고 실로 8년간이란 세월동안, 신라는 당과의 힘겨운 전투를 감내하고 나서야, 겨우 평양 이남이라는 반 토막의 통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회고하면 통일 신라는 고구려 땅 거의 전부를 포기한 무모한 전쟁으로, 이때 우리는 실로 민족의 반, 국토의 반을 잃었기 때문에 비운의 통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