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12일 막을 내린 제4회 서울여성영화제는 여성 감독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영화‘숨겨진 반쪽’에서 이슬람 혁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사형위기까지 처한 타흐미네 밀라니 감독. 이 번 영화제 뉴스의 초점이었던 그녀의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었다. '여성의 눈으로 보는' 또 다른 세계라는 서울여성영화제, 하지만 그 곳에도 '반쪽'에 대한 모호한 시선은 존재했다.
올 봄은 유난히 황사가 기승이다. 어제도 그랬다. 중국 사막에서 날아온 누런 먼지바람은 여성영화제가 열리는 대학로에도 풀풀 날리고 있었다. 작년 '아네스 바르다'와 행복한 조우를 한 기억을 준 여성영화제가 벌써 4회를 맞았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저녁 7시 다큐영화는 표를 구하지 못했고 다음영화를 9시 40분까지 기다려야 할 만큼…. 바람이 심하지 않았더라면 좀 걸었을 터인데, 코와 입으로 먼지바람이 계속 틈입하는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 날씨였다.
영화제에 가면 나는 좀 관대해지는 것 같다. 비록 테크닉은 미숙하고 거칠지라도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람에 대한 사랑, 혹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남다른 영화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가끔 단지 작품 수를 채우려고 검증되지 않은 전혀 수준이하의 작품을 끼워 넣어 곤혹스럽게 하기도 하지만….
여성영화제는 여자들만을 위한 건 아니지만 주로 여자들이 보는 것 같다. 가끔 보이는 남자들은 아주 깬(?)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여성영화제는 대체로 여자들이 만든 영화들을 묶어 보여준다. 그리고 여성의 삶과 여성성을 다룬 영화를 중점으로 보여준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결혼 그리고 성... 뭐 대체로 그런 것이다. 내가 볼 수 있었던 영화는 레즈비언 커플의 삶을 조망한 중국 영화 '박스(The Box)'였다.
최근들어 몇몇 사람들이 커밍 아웃(coming out)을 하고 트렌스젠더인 하리수는 인기가 높다. 호모섹슈얼이든 트렌스젠더든 여전히 사회의 반감은 강하다해도 점점 허용적이다. 이런 시대에 레즈비언의 삶을 '무심히' 조망해보는 것은 사실 전혀 신선하지 않았다. 두 여자를 인터뷰 형식으로 따라가는 에코 윈디 감독의 시도는 진부했다. 레즈비언이 꼭 남자에게 실망하고 성폭행을 당하고 사랑을 받지 못해서 되는 것인가. 그리고 늘 가슴을 드러내고 서툰 섹스를 하고 파트너를 바꾸고 질투를 유발하며 사는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드러낼 때의 은밀한 감동이란 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어떤 관계이든 서로 우위를 점하려고 실랑이를 벌인다거나("너희는 누가 주도권을 잡았니"라는 다른 레즈비언에게 묻는 질문) 상처 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이기심 등에 공감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보다는 옆집 여자에게 소주를 한잔 부어주고 살아온 얘기를 들어보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레즈비언의 삶이라 해서 특별히 더 상처받은 삶도 아니고, 남자혐오증 환자들도 아니며, 그냥 누구나처럼 고만고만한 삶을 살아갈 뿐일텐데….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몇몇 사람들이 중간에 빠져나갔고 나 역시 하품을 참느라 눈이 충혈되었다. 집으로 가는 마지막 전철에는 술 취한 남자들이 충혈된 눈으로 몸을 흔들거리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