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아야,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네 모습에 잠깐 동안 당황했었단다. 예의바르고 단정한 것으로 치자면 내 제자 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분명한 너의 모습에 비추어보면 오늘 같은 갑작스런 방문은 정말 예상 밖이었단다. 내가 출장이라도 가는 날이었더라면, 갑작스런 일로 교실을 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서운했을까? 뒤집어놓고 생각해보면 너와 나 사이에 그만큼 격이 없을 만큼 친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아무런 연락 없이 찾아가도 반겨주는 어버이처럼, 나도 너에게 그렇게 가까운 의미로 새겨져 있어서 오히려 고마웠단다.
23년 전, 결혼과 함께 초보 교사 2년차인 내가 6학년인 너를 만나 담임이 되었을 때, 매사에 분명하고 실수하나 용납하지 않으며 우등생이던 네 모습이 너무 단정해서 오히려 내가 더 긴장하곤 했었던 것을 아니? 이름처럼 곱던 글씨체하며 빼어난 글 솜씨로 성실함 그 자체인 네 일기장을 보던 일은 큰 기쁨이었단다. 학생 수가 많은 교실에서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착하고 부지런했던 너희들은 공부까지도 잘 해서 고흥남 초등학교를 빛내주었었지.
그런데도 나는 첫 졸업생인 너희들을 다 가르친 다음에 졸업을 시키지 못한 슬픈 담임으로, 늘 미안한 담임으로 남게 되었었지.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첫 아이를 출산하는 바람에…. 출산 후 사흘 만에 4시간을 달려 졸업식장에 가겠다고 나서는 나를 말리던 친정 부모님과 남편의 손에 잡혀 울고 말았던 1983년 2월을 결코 잊어본 적이 없단다. 지금 생각하면 임신한 지 9개월이 되도록 교장 선생님께 말씀도 드리지 않고 옷으로 가리고 다닌 그 무모함은 거의 무지에 가까울 정도였단다. 행여 학교에 피해가 갈까봐, 너희들에게 미안해서 오히려 학급일과 학교 일에 더 매달려서 유산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었지.
겨울 방학에 들어가던 날 교장 선생님께, 2월에 출근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릴 때서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되셨으니 어지간히 답답한 사람이 나였단다. 그렇게 숨기고 감추고 조심해서 낳은 아이라서인지 우리 딸아이는 지금도 순하고 소심한 지도 모른단다. 태교에서부터 당당하게 키우지 못한 내 잘못을 탓하곤 한단다.
출산 휴가를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3월 첫날에 학교에 가서도 나는 다시 6학년 담임과 경리 업무를 맡느라고 너희를 졸업시키지 못한 서운함을 음미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었단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모두 불러서 자장면 파티라도 해 줄 텐데, 참 미안하다고 한 번 씩 안아주기라도 해야 했는데 그 생각조차도 못했구나. 몇 년 전 동창 모임을 하면서 너희들이 나를 초대하여 시집 출판을 축하해 줄 때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단다. 졸업시켜주지도 못한 담임을 잊지 않고 해마다 나를 찾아주는 고마움을 언제 다 갚을까? 졸업식에 담임이 오지 않아 눈물바다를 이루었다는 후일담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지금도 눈물이 나는구나.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진학하여 10여 년 이상 좋은 직장에 다닌 네가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결혼도 미룬 채, 새 출발하는 모습을 보여준 오늘, 젊은이다운 패기와 열정을 높이 사고 싶구나. 곁길로 가 볼 틈도, 그럴 생각도 못하고 앞만 보고 살아온 네가 그처럼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도전을 다짐하며 신고식을 하러 찾아온 모습이 참 아름다웠단다. 부디 너의 잠재의식과 두뇌 속에 부정문보다는 긍정문을, 마이너스보다는 플러스가 되는 씨앗을 뿌리거라. 성공이란 결국 ‘정신적인 습관’의 산물이란다. 인간의 두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두뇌는 놀랍게도 부정문보다는 긍정문을 더 잘 처리한다는구나. 단 1%도 부정적인 생각의 씨앗을 심지 말거라.
은아야! 너와 마주 앉아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참게 탕을 먹던 즐거운 저녁 식사에 도전의 용기를 축하하는 술잔 대신 밥그릇을 부딪쳤지만, 다음에 올 때는 못 먹는 술이지만 마음껏 축하하는 술잔을 권하고 싶구나. 인생은 도전하는 자의 몫이며 너의 젊음이 그것을 밀고 있으며 멀지 않은 곳에서 나도 힘껏 밀고 있을 테니 마음 놓고 달려보렴.
내 생일을 나보다 먼저 알고 선물해 준 연보라색 실크 머플러를 걸칠 때마다 자식들이 사 준 것처럼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곤 했단다. 이쯤 되면 팔불출에 가깝지? 다음번에 올 때는 든든한 신랑감이랑 같이 오렴. 네가 얼마나 좋은 아가씨인지 네 자랑을 흠뻑 할 테니….
사랑하는 은아야! 이제 보니 너를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해 준 적 없는 것 같구나. 6학년 겨울 방학 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며 그리움을 전하던 사랑 많은 네 모습을 상기하며 따스해지는 가슴을 느낀다. 이젠 편하게 메일을 주고받으니 네가 제자라기보다는 친구 같단다. 갑자기 찾아와도 되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밤중에나 새벽에 찾아가서 마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빨리 아줌마가 되었으면 한다.
너를 볼 때마다 훌륭한 선생님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이제야 먼 길 돌아와 제 자리를 찾아가는 너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알프레드 마샬이 말한 것처럼 너에게는 훌륭한 교사에게 필요한 두 개의 H가 넘치도록 있단다. 냉철한 머리(Cool Head)와 따뜻한 심장(Warm Heart) 말이다. 아직도 나는 두 가지가 다 부족해서 늘 주저앉곤 하지. 아니 이미 바닥을 보이는 내 모습에 놀라 도망치고 싶어 하곤 하지. 무모한 정열만 남아 그나마 남은 것마저 태워버릴까 봐 안절부절 못하는 지도 모른단다.
부디, 건강을 잃지 말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한 치의 의심도 하지 말고 정진하여 환하게 웃으며 만나는 날을 고대할게. 나는 너를 믿는다! 우리 반의 공부짱이었던, 매사에 모범생이었던 너의 도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