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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리포트(미분류)

나를 지켜준 '아버지의 손'

아버지! 마음속으로 그 이름를 부를 때마다, 저 머언 심연의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처럼 가슴 한 끄트머리부터 아려 오는 아픔 한 자락. 이내 눈가에 이르면 이슬로 맺히고 마는 그 이름. 그것은 모차르트의 플루트 협주곡을 들을 때 느끼는 예민한 아픔 같은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 드린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아버지의 손은 크고 부드러웠으며 따뜻하셨는데 그것을 느끼기까지는 시간을 너무나 많이 보낸 후였다. 그것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버지는 자식 복이 없어서였는지 마흔 다섯에 이르러서야 딸 하나만을 보신 채 득남을 못하신 분이다.

그렇게나 기다리던 출산, 사흘 밤낮을 산통으로 시달리게 하고 태어난 내가 딸이란 것을 아시고 사흘 동안 눈물을 안주 삼아 술을 드셨다는 아버지.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강하고 올곧게 살라며 지어 주신 내 이름. 자라면서 내게는 목적의식 같은 것이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허전한 공간을 채워 드리기 위해서 나는 딸이면서도 아들 노릇을 어느 누구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리광을 부리기에는 아버지의 시간이 너무 빨리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쓰기 편한 샤프 연필보다는 육각진 연필을 깎아 쓰는 걸 좋아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필통을 열고서 연필을 깎아 주시기 위해 특별히 만드신 손칼로 정성스럽게 다듬어 주시던 아버지의 체취를 그리워하면서. 향내가 나는 연필 냄새에 배인 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그리워한다.

철이 들어가면서 아들이 없는 집안에 태어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을 편히 모시는 길임을 알기 시작한 5학년 늦가을. 가난한 우리 집에 드리워지기 시작한 어두움, 까닭 모를 병으로 앓기 시작한 어머니의 병환, 희망을 잃고 일손마저 놓아 버리시던 아버지의 탄식. 그로부터 나는 너무나 빨리 철이 들어갔고 아버지의 아픔은 내 아픔으로 남기 시작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가던 날, 아버지의 큼지막한 손에 잡히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날. 입시를 통해 중학교를 진학하던 마지막 해. 시골 학교에서는 광주의 명문 중학교에 진학시키는 게 학교와 선생님의 자랑이었던 때였다. 전남 여중에 20명이 지원하여 8명이 합격함으로써 학교의 명예를 높였던 우리들.

나를 제외한 7명이 진학한, 아픔을 남긴 353번. 합격한 것만으로도 기뻐서, 찾아오신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학교를 거닐던 그 날. 입학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나의 아픔은 추웠던 그 겨울만큼 슬펐을 아버지의 손안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 마련해 놓은 등록금은 물론 살던 집까지 내놓게 되었음을 알고 치른 시험. 그것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나의 소망이 함께 한 시험이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병상의 어머니, 어긋난 학업의 길. 세 식구 앞에 놓인 순탄하지 못한 삶의 여정 위에서 좌절할 시간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던 절박한 현실. 병든 어머니를 대신하여 가사 일과 독학, 일거리를 찾으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행운의 여신을 마음에 새기고 산 9년.

중, 고등학교 과정의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공무원 시험을 통과하면서 우리 세 식구는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다. 객지에서 고생하시던 부모님을 모셔 와 단칸방을 얻어 모시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늘을 향해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이미 노쇠해지신 아버지의 휘어진 등 뒤로 다가오는 석양의 그림자는 너무 슬펐고 어머니의 허약한 심신 또한 추스르기 힘든 아픔이었다.

1977년 7월, 첫 월급을 드리던 날.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고 미안해하시며 기쁨의 눈물로 가슴 아파 하실 때 잡아 드린 아버지의 손은 유년 시절 크고 부드럽던 그 손이 아니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인의 손이었다. 힘든 삶의 여정이 아버지에게서 따뜻함을 앗아갔으리라.

부모님이 계셨기에 지탱할 수 있었던 학업의 길. 친구들의 멋진 교복, 당당한 여고생의 모습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았던 사춘기,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을 택하며 통신대학으로 길을 돌리면서도 기쁨일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족을 책임지려는 나의 노력을 기쁨으로 받아 주신 아버지의 따뜻한 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식 날 신경통으로 걷지 못하신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입장하지 못하신 채 혼주석에 앉아 계셨다.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의 손을 잡아 이끌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내 짧은 필력으로 어찌 형용할까? 허전하셨을 아버지의 마음을…….학사과정을 마치고 순위고사를 치른 후, 교사의 길을 걸으며 나는 늘 '효도하는 어린이'를 중요시해 오고 있다. '효'의 가치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믿기에.

첫 딸을 낳고 둘째인 아들을 낳았을 때 나보다 더 기뻐하신 아버지. 이제 그 아버지가 일흔 넷의 삶을 접으신 지 20년도 더 넘은 지금. 아버지는 내 가슴에 살아 계신다. 몸이 불편하셔서 집에서 목욕을 시켜 드릴 때 내 손보다 작아진 아버지의 손을 씻겨 드리며 눈물을 감추던 그 때가 그리운 계절이다. 물질 때문에, 병든 아내 때문에 힘들었던 아버지의 손이 못 견디게 그립다. 그 큰손에 담긴 무언의 비원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하셨음을!

흰 눈이 쌓이던 날 식어가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목울음 울던 그 날. 창밖의 동백 꽃잎처럼 삶을 접으신 아버지가 자리한 그 빈자리가 너무 커서 울었고, 아버지의 삶이 아파 또 울었었다. 이젠 세상 어느 곳에도 계시지 않은 아버지라는 이름의 큰 손.

아기자기한 유년의 추억보다는 연민이 앞서는 아버지의 애잔한 삶이 해를 넘길 때마다 더 짙은 그리움으로 지천명을 바라보는 내 눈시울을 젖게 한다. 내 정신의 껍질이 엷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시는 아버지.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운 이름 하나를 가슴에 새겨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어버이만큼 넓은 하늘이 있을까? 가난과 시련 속에서도 나를 지탱하고 삶의 목적의식으로 다가와 젊은 날의 추억으로 남아계신 아버지의 이름 앞에, 나는 새살이 돋은 나의 오늘을 드리고 싶다. 그리운 아버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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