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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아직도 축구가 가죽 공 놀음으로 보이니?"

월드컵, 책으로 진지하게 되새기기

축구보다 더 재미있는 축구 책이 있을까? 그건 아마 소설보다 재미있는 평론을 찾는 것과 같은 작업이 아니겠냐고. 축구는 재음미가 불가능하다고.

승패와 점수를 알고 보는 재방송에 무슨 맛이 있겠냐고. 축구는 바로 그 순간에 몰입하는 어떤 것이며 그 시간이 지나면 추억의 영역으로 흘러가는 것이며, '떼지어 공을 차는 아주 단순한 경기'일 뿐이라고. 그 이상 축구에 대해 더 할 말은 없다고 생각하던 당신. 월드컵이라는 축제의 터널을 넘어 온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축구에는 '인류의 대제전'이니 '평화의 한마당'이니 하는 공허한 수사학으로 손쉽게 주물러 버릴 수 없는 온갖 요소들이 농축되어 있다. 한일 두 나라 축구의 애증 어린 대결의 역사를 훑어봐도 이는 금방 증명된다.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 때 한·일전에서 아나운서의 "후지산이 무너집니다!"라는 멘트가 단지 이겼기 때문에 나왔다고 생각하는 한국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개막 경기로 치러진 프랑스와 세네갈전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 최강과 아프리카의 다크호스의 대결? 이건 너무 순진한 표현이다. 세네갈에게 있어 축구는 제국 프랑스의 식민지라는 경험으로부터 추출되는 그 어떤 사회적 행동이다. '죽음의 F조'를 달구었던 것은 비단, 천재 미드필더 베컴(잉글랜드)과 베론(아르헨티나)의 충돌만이 아니라 대처 시대의 뼈아픈 상흔으로 남아있는 포클랜드 전쟁의 연장전으로서 더욱 뜨거웠던 것이다.

아르헨티나를 이긴 영국이 그토록 열광하고, 베컴에게 기사작위 수여를 검토하는 것 등은 모두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종차별과 내전의 상처를 겨우 씻은 남아공과 크로아티아의 월드컵 출전을 어떻게 단순한 '공차기 시합'으로 축소할 수 있겠는가.

물론 축구를 그 사회의 역사성에 단순히 대입하는 것은 환원주의적 오류에 빠질 우려가 크다. 그러나 '축구는 축구일 뿐'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체험한 우리는 사이먼 쿠퍼의 '축구 전쟁의 역사'(이지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각 대륙의 축구 강국을 몇 년 동안 직접 발로 뛰며 써낸 사이먼 쿠퍼의 이 책은 다큐멘터리가 지녀야 할 미덕을 100% 충족시킨 본보기다.

그는 추측이나 섣부른 진단을 거절한다. 아주 친절하고 열성적인 여행 가이드처럼 축구 강국의 주요 인사들, 그러니까 선수, 감독, 임원들을 일일이 만나 그 나라의 축구가 어떤 집합적 역사의 산물이며 국민들의 광기어린 행위가 어떤 사회적 맥락의 결과인가를 그는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잉글랜드 축구와 대처리즘, 스페인 축구와 민족문제, 아르헨티나 축구와 군사정부, 스코틀랜드 축구의 종교 전쟁 등…. 이 책을 성의껏 읽는다면 월드컵 성공적 개최에 붉은 악마로서 일조한 당신은 이제, 축구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즐기게 될 것이다.

또 하나, 짚어보고 가야 할 것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우리의 ‘길거리 응원’이다. 비폭력적이며 다양한 계층, 연령, 성을 아우른 붉은 물결의 응원문화. 우리도 놀랐지만 서구인들은 우리의 응원을 축구경기 그 이상으로 관심을 보이며 연일 대서특필했다. 왜 그랬을까? ‘월드컵, 신화와
현실’(윤상철 외 엮음/ 한울)을 펼치면 그 해답이 들어있다.

"유럽 축구는 전통적으로 노동자 계층의 지지가 가장 크다. 많은 축구장이 큰 산업도시의 노동자 거주 지역에 위치해있고 선수 대부분은 노동자 출신이다. 축구는 기술, 육체적 강인함, 남성적 공격성, 단결 등 노동계급이 중시하는 가치를 반영하며 인기를 끌었지만 축구가 제도화·프로화·국제화·상업화하면서 노동계급이 중시하던 과격함은 경기에서 점차 사라지게 됐다.

경기에서 과격함이 사라지자 노동계급 관중들이 직접 과격함, 폭력성을 행사하게 된 것-훌리건(hooligan) 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무리-이다. 따라서 유럽 훌리거니즘은 자신이 지지하는 팀의 승패에 무관하다. 이겼을 때의 기쁨까지도 폭력적으로 발산하는, 축구장 나들이에서 소란피우기 자체를 즐기는 훌리거니즘이 일상적 문화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국내의 훌리거니즘은 팀이 졌을 경우나 심판 판정에 불만이 있을 경우에 한정된다. 열광적이지만 폭력적이지 않은 ‘붉은 악마’가 새로운 응원문화의 창출로 주목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슛~골인. 박지성 골! 아! 멋있는 골!! 16강, 16강입니다.…"
방송 캐스터의 목 메인 함성이 텔레비전을 뛰쳐나온다. 슬로모션으로 다시 보여주고 또 다시 보여주는 골인 장면. 옆집 환호성이 담을 건너 들려오고, 콧날 시큰해졌던 감동이 살아난다. 승패와 점수를 알고 보는 재방송이 '명화'로 곱씹을 감칠맛이 있다는 사실을, "오~ 필승 코리아!" 붉은악마 응원가의 메아리 속에서 '떼지어 차는 가죽 공 놀음'인줄만 알았던 축구가 얼마나 큰 힘을 내포하고 있는 지를, 당신은 이제 더 분명히 알게 된다. 축구보다 재미있는 축구 책은 아닐지라도 축구만큼 재미있는 두 권의 책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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