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에 등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지난 5월, 1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주홍이가 교무실로 찾아왔다. 평소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녀석이 어렵사리 내놓은 것은 바로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있는 원고 뭉치였다. 몇 달 동안 고민해서 쓴 소설인데 선생님이 한 번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주홍이가 다녀간 다음날, 같은 반 대영이가 찾아왔다. 아이들한테는 탤런트로 통할 만큼 발랄하고 재치넘치는 녀석이다. 그런데 여느 때와는 달리 쑥스러운 듯 한참을 서성대더니 "선생님, 제가 쓴 시(詩)인데 한번 봐주세요"라며 빛바랜 누런 종이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주홍이의 소설은 입시 중심의 교육 현실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이 주인공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주홍이 자신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문체나 박진감 넘치는 사건 전개 그리고 능란한 서술 기교로 미루어 볼 때 잘만 다듬으면 훌륭한 재목이 될 듯 싶었다. 대영이의 시는 아직은 설익은 풋고추 같았다. 시어 하나하나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애쓴 흔적은 역력했으나 단순한 구성과 상투적인 표현이 눈에 거슬렸다.
시를 쓰겠다는 의욕은 넘쳤지만 감정을 추스르고 적절히 녹여내기까지는 아직 배울 점이 많아 보였다. 일단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선생이 생기자 녀석들은 교무실 문턱이 닳을 정도로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주홍이는 구체적인 작품보다는 소설가로서의 자질 같은 심리적인 부분의 조언을, 대영이는 자신이 직접 쓴 작품에 대한 평을 부탁했다.
그렇게 문학을 매개로 한 대화가 이어지면서 주홍이는 점차 자신의 글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으나 대영이는 점점 더 힘들어 하는 기색을 보였다. 작가 어머니를 둔 주홍이와는 달리 대영이 부모님께서는 시인이 되겠다는 아들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름방학 보충수업이 한창일 무렵, 주홍이가 찾아왔다. 지난번 문예 공모전에 응모했던 작품이 예심을 통과해 문학캠프 참가 자격이 주어졌고, 2박 3일의 캠프 기간 중에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소설가를 만날 수 있었으며, 그 분이 심사한 백일장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예전보다는 뜸해졌지만 아직도 시를 들고 찾아오는 대영이는 부모님의 거센 반대 때문인지 대학에 가기 위해 여름방학 보충수업에 매달리고 있었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입시 공부를 하느라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시에 대한 열정은 버릴 수 없었던지 꾸준히 시집을 읽거나 시를 쓰고 있었다.
예년보다 뜨거운 여름, 그 뜨거운 열기를 마주하고 소설가와 시인이 되겠다고 나름대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두 녀석으로 인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적성이나 흥미와는 거리가 먼 교육 현장의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할 때, 행여 그들이 입시 중심의 교육으로 인해 자신들의 소중한 꿈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