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은 자신의 죽음을 '단지 인(仁)을 이루고자 할 뿐 충(忠)은 아니다고 했고 충을 이루지 못함이 부끄럽다고 했다. 매천사 입구에는 그 분의 뜻을 기려 성인문(成仁門)이 세워져 있다.
나는 몇 년 전 매천 선생님의 증손인 선생님과 같이 근무할 기회가 있었다. 초상화에서 보이는 깔끔함을 지닌 선생님은 지금 현직에서 교감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시다. 올 곧은 기개와 대쪽같은 성품으로 다른 분들보다 한참이나 더디게 승진을 하셨다.
매천 황현 선생님의 후예로서 그 분이 느끼는 중압감을 깊이 접해 볼 기회는 없었지만 증손자로서 황현 선생님의 유품들이 많이 소실되거나 도난 당한 아픔을 토로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있는 우리의 현대사를 바라보며 나라를 잃은 비통함을, 글을 배운 지식인의 고뇌를 죽음이라는 극한 방법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황현 선생님의 숭고한 뜻을 새겨듣는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친일 후손들은 잘 사는데 반해, 반일 후손들은 하나같이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지... 후손인 그 분도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그처럼 고귀하고 훌륭한 애국지사이신 증조부의 유품과 사당을 국가에 맡긴 후로 제대로 보존이 안 되어 마음 아파 하셨었다.
구례 관내 학교에서는 매천사를 찾아 체험학습을 하는 일이 많은데, 미리 연락을 하지 않으면 관리하는 분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매천사를 관리하는 분이 정식으로 있는 게 아니고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때 안내를 해 주는 정도라서 거의 문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심하게 가을을 타는 나는 11월을 보내는 게 늘 힘들다. 특히 매천 황현 선생님의 절명시를 읽으면 더욱 그러하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을 생각해 보니 인간 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하시며 나라를 잃은 슬픔을 누군가 한 사람 쯤 죽음으로 갚지 않으면 선비의 나라라고 하겠느냐는 통렬한 책임의식 앞에 서면 그저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국권침탈의 역사가 도처에 남아 있으니 어찌 해야 하는가?
알게 모르게 쓰고 있는 언어의 잔재, 역사 의식의 잔재를 비롯해서 학교 문화 곳곳에 아직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이방인.
11월 한 달만이라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매천 황현 선생님의 지고지순한 나라사랑의 우국충정을 배울 수 있게 하는 적극적인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린다. 게시판 한 쪽에서 이달의 문화 인물로 날짜만 채우다가 잊혀지게 하기에는 그 분에게 너무 죄송한 탓이다. 아직도 이 땅의 후예들의 가슴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조선의 선비 정신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꽃자리임을 자각하여 열심히 일하는 일, 내가 가르치는 제자가 귀한 존재임을 깨닫는 일, 나를 있게 해 준 어버이가 하늘만큼 귀하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는 일, 일터에서 묵묵히 일하며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남편과 아내의 노고에 손잡아 주는 일도 크게 보면 애국하는 일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위로는 국정을 책임진 위정자로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11월 한달만이라도, 매천 황현 선생님의 포스터가 붙어있는 한 달만이라도 싸우기를 멈추고 무엇이 옳은 일이고 어떤 언행이 도움이 되는 지 자숙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목숨을 버려서 나라를 지킨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보며 말만 살아 있는 현실이 아프고 날만 새면 피튀기는 추한 언어로 서로 삿대질하며 싸우는 현실이 슬퍼서이다.
이제는 얼굴을 가린 채 손가락 끝으로 서로를 짓이기는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숨어서 윽박지르고 냉소적이며 근거없는 말로 난도질하는 가상 공간의 횡포는 조선의 선비 정신이 살아 있는 나라가 아니다.
옳지 못한 일 앞에서는 목숨을 내걸고 친필로 상소를 올린 기개 높은 선비 정신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입바른 소리를 하려거든 먼저는 자신을 살펴 떳떳해야 함을 생각하고 자기 이름 석자를 밝혀 뒤로 숨지 않았던 그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억울한 일을 당해서 익명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본인을 밝히는 게 예의이며 도리라고 생각한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이라면 내뱉지 말아야 하며 남에게 상처주는 일도 삼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서 세 치 혀가 가장 죄를 많이 짓는다고 했는데 요즈음은 손가락이 혀보다 더 죄를 많이 짓지 않을까? 손을 움직인 것은 마음이 먼저이니 어쩌면 마음이 들어 있는 뇌일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매천 선생님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며 글을 배우는 자세를 다잡아 주었다. 모름지기 바른 글씨를 쓸 것이며, 이롭게 하는 말을 할 것이며 책임지는 말을 해야 한다고. 우리 반은 1학년 아이들이지만 좋지 않은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벌점을 준다. 내가 없어도 자기들끼리 실천한다. 또 공연한 말로 친구를 아프게 하거나 근거 없는 말로 장난을 쳐도 따끔하게 혼을 내준다.
작은 숙제를 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핑계나 변명을 늘어놓는 일, 준비물을 챙기지 않고도 미안한 기색조차 없으면 벌점을 준다. 1학년이라 해도 말귀를 알아들으니 따끔하게 야단치면 잘못을 고친다. 잘한 행동에는 푸짐한 칭찬이 따라간다.
좋은 버릇을 길들이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버릇을 배우는 것은 순간이다. 남의 말을 좋게 하는 좋은 습관, 잘못 하고도 반성하지 않는 버릇, 까닭없이 해코지 하는 고약한 버릇만이라도 고칠 수 있다면, 우리 반 아이들은 11월의 문화인물인 매천 선생님이 잠들어 계신 이 고장 구례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 해도 되리라.
인(仁)을 이루는 일의 시작이 덕(德)으로부터 비롯됨을 생각하며 자신을 반성하고 친구를 진심으로 칭찬해 줄 줄 알며 배운 글을 부끄럽게 쓰지 않는 아이들이 될 수 있도록, 매천 황현 선생님을 우러르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