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엔 무엇이 들었을까. 간편한 옷가지, 주전부리할 간식 몇 가지와 화장품…. 짐을 싸는 동안 당신의 마음은 이미 여행지로 달음질친다. 아! 그러나 너무 빨리 달려나가지는 말자. 피로한 당신을 회복시킬 비타민 같은 여행을 꿈꾼다면, 가벼운 책 한 권 함께 꾸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책 한 권 물리적 무게는 가벼울지라도 당신의 마음에 진중(珍重)한 메시지를 남겨줄지도 모르니까.
#읽은 책 또 읽기-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읽은 책 또 읽기’는 여행지에서 해볼 만한 일종의 ‘여유 부리기’이다. 여행만큼 마음의 빗장을 열어 더 많은 감동을 흡수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예언자'는 두 명의 남녀 예언자가 질문하고 대답하며 사랑 결혼 슬픔 기쁨 등 삶의 진리를 들려준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결혼에 대하여’중- 40년이 넘도록 잔잔한 감흥을 일으키며 시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예언자'는 최근 새롭게 포장되어 재출간 됐다. 화려한 외관만큼이나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운 시어와 수채화들은 당신의 영혼에 쉼표를 선물한다. 특히 화가 지브란이 그려낸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림은 여행의 여유를 한층 더 만끽하도록 해 준다. 이 책을 출근 길 버스나 지하철에서 속독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라면, 다시 한 번 읽어보기를.
#펼쳤다 접었다 하며 읽기- 하이쿠 모음, '한 줄도 너무 길다'
기내에서, 해변에서, 호텔 방에서 잠깐씩 책을 열어보자. 펼쳤다 접었다 하며 읽는 재미도 느껴본 자만이 아는 쾌락이다. ‘어디까지 읽었지?’하며, 두 번씩 겹쳐 읽어도 상관없다. 그 부분들은 더욱 깊은 인상으로 다가올 테니까.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는 이처럼 쉬엄쉬엄 읽기에 좋은 글이다. ‘나비 한 마리/ 절의 종에 내려앉아/ 졸고 있다’라는 부손의 작품에서도 나타나듯이, 일상의 풍경을 묘사하는 직접적이고도 간결한 일본의 전통시, 아무리 천천히 읽으려 해도 5초도 안 걸리는 하이쿠가 읽는 이의 마음에 무한한 감동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절과 자연이 주는 감동, 빈자의 미학을 담은 철학을 전하며, 결국 우리네 삶의 본질을 말하는 하이쿠. 바쇼, 이싸, 부손 등 하이쿠 대가들의 시가 소개된 '한 줄도 너무 길다'를 통해 펼쳤다 접었다 하는 감칠맛을 느껴보자.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바쇼-
#한 번도 쉬지 않고 읽기- 장 그르니에의 '섬'
‘길거리에서 이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 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 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알베르 카뮈는 서문에서 '섬'을 읽는 방법을 이렇게 제시했다. 추리 소설도, 농담 섞인 어조의 글도 아니지만, 쉬지 않고 읽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는 책. 어쩌면 책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성찰에 몰두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 내가 상처라고 믿었던 것들의 영원한 흥취와 덧없음이라니! 나는 애초에 상처로 지어진 집이며 그리하여 새로이 얻은 상처란 없는 것이다. 세계의 헛됨을 아는 그르니에의 문장이 만드는 지극히 아름다운 울림 속에서 느릿느릿 산보를 해 보라. 가장 일상적인 것들이 보여주는 낡음 속에서 빛나는 '공'(空)의 매혹. '비어 있음'은 슬픔도 쓸쓸함도 그 무엇도 아닌 것이며,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인가의 힘으로 우리는 다시 세상을 껴안게 됨을 '섬'은 가르쳐 준다. 여행의 목적이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한 것'이듯 이 책 또한 자신을 들여다보게끔 만들어 준다.“나는 저 꽃이예요. 저 하늘이예요. 저 의자예요. 나는 그 폐허였고 그 바람, 그 열기였어요.” 그르니에가 사랑한 고양이 물루가 창틀에 턱을 괴고 속삭이듯이.
#휴가의 끝에 읽기- 알랭 레몽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단 한 장의 흑백사진이 그 안에 담긴 사람의 일생 혹은 수십 년 세월을 모두 말해주는 경우가 있다. 누렇게 색이 바래고 귀퉁이는 떨어져 나가고 군데군데 얼룩진 흑백사진.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그런 흑백사진 같은 소설이다. 책을 번역한 김화영 고려대 교수가 “여행 중 우연히 발견한 이 소설을 읽다가 수십 년 동안 참았던 눈물을 ‘퍽’ 하고 터뜨릴 뻔했다”고 말한 탓일까. 제목에서 오는 여운이 ‘휴가의 끝’과 잘 어울릴 것만 같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이의 이른 죽음을 통해 ‘삶은 이별의 연속’임을 말하는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왜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모든 것과 작별을 해야 하는 것일까? 왜 모든 것들은 허물어지고 마는 것일까? 왜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것일까?’를 묻는 이 책은 여행의 끝에 선 이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