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는 묘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가 그려내는 황폐한 세계는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됩니다. 탐욕의 잉여물(剩餘物)로 더럽혀지고 황량해지는 자연, 탐욕의 경쟁이 만들어내는 벽 때문에 소통이 차단되고 그래서 소외되어 가는 사람들, 더 많은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기계처럼 꽉 짜여진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마치 치히로의 부모가 음식에 대한 탐욕 때문에 돼지로 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탐욕을 버리고 본래의 순연(純然)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탐욕스러운 존재인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거품의 겹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명징(明澄)한 성찰이 필요하겠지요. '그노티 세아우톤(너 자신을 알라)' 이 말에는 우리 정체(正體)에 대한 성찰의 요구가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아는 것, 그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됩니다. '나'를 설명하려면 '나'의 이름 석 자를 말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쿠는 치히로에게 어떤 경우에라도 "치히로라는 이름을 빼앗기지 말라, 이름을 빼앗기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말은 인상 깊게 남습니다.
유바바는 치히로[千尋]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지우고는 센[千]이라는 이름을 줍니다. 치히로와 센은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두 사람. 센은 유바바에게 종속된 생활을 합니다. 치히로가 마음을 기울이는 하쿠는 악룡(惡龍)입니다. 하쿠는 유바바에게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이어받으려
하지요. 하쿠는 참으로 묘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형상으로 있을 때와 용의 형상으로 있을 때는 서로 다른 존재로 나타납니다. "다시 돌아가려면 절대로 이름을 빼앗기지 말라"는 하쿠의 말은 그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도 이름을 알아야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치히로에게,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세계로 다시 돌아간다는 이야기겠지요. 그런데 왜 이름을 빼앗기지 말아야 할까요. 이름이야말로 우리들의 실체를 명확히 규정짓는 개념이기 때문인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구절은 미묘한 울림을 지니고 있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하나의 몸짓- 하나의 의미'에는 참으로 많은 것이 덧칠해졌습니다. 처음 그 말은 단지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수줍은 표현을 대신해 줄 수 있는 말이었는데 차츰차츰, 어쩌면 시인이 생각했던 알맹이인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에 이제야, 조금 근접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우리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고,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어주길 바라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이름들이, 그 의미들이 우리들의 삶을 구속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름이 하나의 고정된 틀이 되어 삶을 옥죄고 압박하기 시작하면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자신의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낯선 시간과 공간으로 흘러드는 일은 나이가 들어갈 때마다 수없이 망설이게 하고 멈칫거리게 하지요. 답답하지만 그만큼 편리한 일상에 익숙해진 터라 더 이상 고생하며 모험을 하고 싶지 않은 까닭입니다.
치히로가 센의 삶을 사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어른들에게는 새로이 모험을 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한 번쯤은 다른 이름으로, 다른 의미를 지닌 존재로 탈바꿈해 보기,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탈출해 보기. 결국 예전으로 다시 되돌아온다고 하여도, 그것은 우리들 삶의 활력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또 다른 세계로 흘러들어 가보는 것은, 잠깐 동안만이라도 나를 변신시켜보는 것은, 스스로를 성숙시키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차가 물길을 달리던 영화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물 속에 길게 뻗은 기차길,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기차에서 멀리 바라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