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할아버지 한 분이 교무실로 오셨다. 얼굴표정으로 보아서는 60대 중반 쯤으로 보였는데 70세도 훨씬 넘으셨다고 하셨다. 무척 밝고 인자하고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평생을 시골의 햇볕을 쬐면서 사셨을 텐데 무척 밝고 깨끗했다.
“선생님, 여기서 할머니들 한글을 가르쳐 준다면서요?” “예, 어서 오십시오.” “제 집사람도 좀 배우게 하려고요.”
커피 한 잔을 드시면서 자초지종을 말씀하셨다. 부인이 70이 넘었는데 한글을 제대로 모르면서 지금까지 사셨다는 것, 금년에 정읍(마을에서 20여 Km)의 모 단체 에서 주관하는 한글공부를 하러 5일 동안 다니다가 수준이 맞지 않아 ‘스트레스’만 받다 중단한 사실, 너무 딱하고 안쓰러웠는데 원평초등학교에 한글공부반의 공부하는 모습을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한(금년 4월 중 TV 3개사 취재 방영) 서울 쪽에 사는 친척의 전화를 받고 원평초등학교에 그런 평생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말씀 등을 하시면서 부인을 다니게 하고 싶다고 하셨다.
작년 1년 동안 본교의 평생교육 취미활동교실 10여 개 반을 운영한다는 방송 및 신문보도가 수 십 회 있었는데 까마득히 모르고 계셨다고 한다. 본교가 위치한 같은 면내에 사시면서도 모르셨던 것이다. 집에 초등학생도 없고 신문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방송보도는 보지 않을 확률이 훨씬 더 많으니까. 홍보를 학생편이나 언론매체에만 의지했던 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 옛날처럼 동네마다 골목마다 자세한 벽보 안내문을 붙여서 눈에 띄게 하기도 하고 주요 길목 여러 곳에 현수막이라도 설치했어야 누구나 다 알 수 있었을 것 같다.
농촌에서 자란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1958년-1964년)만 하더라도 학교에 다니지 않고 집안일을 하는 또래가 2,30%는 되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이 40 % 정도는 됐던 것 같다. 그러니 필자보다 20여 년 앞선 세대들이야 말로 교육을 받을 기회가 훨씬 적었음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여성들이야 오죽 했을까.
어제는 그 할아버지께서 부인과 딸을 데리고 오셨다. 할머니는 약간 마음이 편해 보이지 않았다. 5일 동안 받았던 부담감이 의외로 컸던 것 같았다. 자신 없는 듯한 굳은 표정이었다. 영감님과 딸의 권유에 어쩔 수없이 오셨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수영반’과 ‘한글반’에 등록하셨다. 딸도 수영반에 등록하였다. 할머니께서는 대필해주는 딸의 능숙한 글씨쓰기를 보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엄마, 잘만하면 1주일 내내 학교에 다녀도 되겠네.”
13개 반의 취미활동 교실이 있으니 적당한 과정을 골라서 매일 다니라는 권유다.
“이 나이에 공부가 된다냐?” “아버지, 어머니가 공부하실 때 잘 가르쳐 주세요. 이것도 모르냐고 구박하시지 말고 함께 공부 하셔야 해요.” “오냐 알았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처지와 당시의 교육환경 등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약간은 무표정한 채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할머니를 앞세우고 한글 교실로 향하였다. 서예반에 다니고 싶다는 할아버지의 단호한 향학열이 참으로 귀하게 느껴지고 부인을 위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직접 두 번씩이나 학교로 찾아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교실의 30여 명 할머니들이 열렬한 환영의 박수를 치셨다. 부디 스트레스 받지 않으시고 재미있게 다니시길 바라면서 때 늦은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분들을 위한 평생교육 활성화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아직도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평생을 기억력에 의존하면서 남에게 글자를 물어가면서 답답하게 사신 분들이 의외로 많다. 요즘 교육기관, 공공기관, 종교단체, 봉사단체 등에서 평생교육을 하고 있어 늦게나마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고령의 수강자들이 공부하기가 어디 그리 쉬울까. 좀더 잘 배울 수 있도록 시설이나 교수학습 자료나 우수한 강사 확보 등을 위한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