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육의 문제점은 어린이에 대한 억압에 있다. 교사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교사가 어린이의 인권을 억압하는 가해자일 수도 있다. 물론 이 주장에는 비판도 많다. 현장에 서면 체벌이 왜 불가피한 줄을 알게 될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그러나 나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아야한다" 고 주장한다. - 본문 중에서
"국가가 교육을 맡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발상을? 그러나 '국가의 권위에 복종하는 신민(臣民)'을 양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으로 여겨졌던 19세기 말 절대왕정사회에서 나온 말이라면 수긍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서머힐'을 설립한 A. S. 닐 보다 한 세대나 앞서 자유교육을 주창 실천한 프란시스코 페레(1859∼1909)의 평전이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1부에서는 박홍규(영남대 법대 학장) 교수가 그의 사상과 생애를 소개했고, 2부에는 페레가 직접 쓴 '모던스쿨의 기원과 이상'을 번역 전재했다.
페레가 고국 스페인에 세운 자유학교인 '모던스쿨'은 아동의 자치를 강조하는 서머힐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아동의 자유와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한, 당대 가장 선구적인 자유학교였다.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격체의 양성에 목적을 둔 페레의 교육철학은 닐 외에 슈타이너, 돈 보스코 등 많은 자유교육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다양성 존중, 인격 존중의 그의 교육은 도중에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군사반란 배후조종'이란 어마어마한 누명을 쓴 채 50세의 나이로 처형됐기 때문이다. 세계사에서 유일한 교육 순교자다.
모던스쿨은 학습방법, 학교운영 등에서 기존 학교와 차이를 보였다. 교재는 유럽 각지 지식인에게 의뢰해 만들었다. 예를 들어 '비망록’과 ‘식민지화와 애국심’이라는 교재는 애국심과 전쟁의 공포, 정복의 사악함을 비판하고 있다. 수업은 공장 작업장 실험실에서도 이루어졌고 지리는 여행을 통해 익히도록 했다. 생물은 식물 채집과 관찰이 주된 학습 방법이었다.
모던스쿨은 남녀공학을 택했다. 당시 스페인 도시에는 공학이 드물었다. 그는 여성이라고 가정에 묶여서는 안되며 양과 질에서 남성과 같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가톨릭의 영향 하에 남성 중심주의가 지배적이던 당시에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유능한 아동과 무능한 아동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며 상벌을 두지 않았고 이미 만들어진 지식을 기계적으로 암기토록 한다는 이유로 시험도 부정했다. 나아가 피억압자인 노동자가 교육의 주체가 돼야 하며 직접 돈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자녀들을 그 학교에 보내 국가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 공화정과 입헌 군주정이 교차한 정치적 격변기의 스페인. 권력에만 몰두해 고위직 쟁탈에만 혈안이 된 위선적 혁명가들과 공교육을 장악한 강고한 카톨릭 교회가 민중을 착취하고 있을 때 페레는 교육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다 목숨을 잃었다. 한 세기쯤 지난 오늘, 한국인의 시각에서 쓴 이 페레의 평전은 ‘자유교육’의 기본이념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바로잡고, 척박한 한국사회의 교육풍토를 돌아보게 한다.
페레는 "아이 자체가 가진 능력을 키워주는 것 이외의 목적이 교육에 개입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국가에 이로운 국민이 될 수 있는가'라는 잣대로 유능한 아동과 무능한 아동을 구별짓지 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현대 국가교육의 '서열화'가 비인간적인 경쟁과 배타심을 유발한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페레로 돌아가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어떠한 명분도 ‘권위에 의한 억압’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교사와 부모 그리고 사회와 국가의 책무는 “아이들을 가르쳐 키우는 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이니까. 100년 만에 부활한 페레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진리를 다시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