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계절이라며 여기저기서 책을 읽으라고 종용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제일 책과 가까이하기 어려운 계절이 가을이다. 높은 하늘, 울긋불긋 물든 들과 산의 유혹이 책의 속삭임보다 훨씬 강렬하기 때문이지요. 마음은 원(願)이로되 글을 읽는 것이 쉽지는 않고, 그렇다고 이 계절을 그냥 흘려보내기도 아쉬운 당신, 글과 그림을 적절히 버무린 책을 처방합니다.
*그림은 없어도 그림이 떠오르는- 디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수많은 사연을 흩뿌리며 험한 길을 걸어갔던 감동과 자동차를 타고 스쳐 지나간 감동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디비드 르 브르통의 산문집 '걷기 예찬'은 걷는 행위를 철학적으로 조명한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가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한곳에 집중하기 위한 과정이다." 걷는 행위가 자기 자신의 내부로 돌아가는 성찰의 행위라고 보는 시각은 동서양이 모두 같은 모양이다. 동양에서 도(道)를 닦는다는 건 '길을 닦는 행위'이며, 도인(道人)은 '길 위의 사람'
아니던가. 길을 걷는 건 그 자체가 도에 이르는 방법이다. 차(車)를 버리고 길을 걸어보자. 도(道)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발 밑에 있다.
*무조건 그림이 먼저- 밀란 쿤데라 외 '책 그림책'
크빈트 부흐홀츠라는 삽화가가 책을 주제로 그린 일련의 그림들에 현재 세계 문단을 주름잡는 작가들이 쓴, 때로는 시 같고 때로는 콩트 같은 짤막한 감상문을 덧붙였다. 눈 덮인 광활한 들판을 가로질러 머나먼 지평선을 향해 가는 한 남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책이 보이는가 하면, 지붕 위
하늘을 마치 마법의 양탄자라도 되는 양 책을 타고 비행하는 사람도 보인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그림은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고 상기시키고 또 상상하게 만든다. 책과 세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사람들은 현실에서 책으로, 책에서 현실로 자유롭게 미끄러져 들어가고 나온다. 책 속의 그림 속의 여인을 보는 당신을, 지금 누군가, 당신이라는 그림이 그려진 책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당신은 책을 통해 세상을 보지만, 혹은 보고 있다고 믿지만, 그 세상이 곧 하나의 거대한 책이라면 그 책을 펼쳐들고 읽고 있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당신이 책을 읽듯 그런 당신 또한 어느덧 읽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읽다 보면 그림을 기다리게 되는- 틱낫한 '틱낫한의 평화로움'
마음 공부의 정점에 이른 살아있는 부처 틱낫한 스님의 '평화로움'은 한 번 읽으면 ‘그저 좋은 말씀’이지만 두 번 읽으면 ‘파도와 같은 말씀’이 된다. 제목과는 달리 마음을 크게 뒤흔들기 때문이다. 책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필 보르게스의 사진들. 티베트, 몽골, 파키스탄 등에서 찍은 눈빛 맑은 어린아이와 어른들의 평화로운 미소는 그 자체로 안식이다. 멈춤의 기술, 분노의 절제, 명상의 적용 등이 사진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더 이상 출구 없는 인생들에게, 혹은 출구를 찾아 나섰으나 제자리로 되돌아오고 싶은 인생들에게 틱닛한 스님은 조용히 나지막하게 말한다. “파란 하늘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가.”
*글을 먼저 읽든, 그림을 먼저 보든- 이철수 '새도 무게가 있습니다'
목판화가 이철수의 판화집 '새도 무게가 있습니다'는 10년 만에 나온 개정판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본 곳이 하나도 없다.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이철수씨는 말한다. 작은 그림에 큰 이야기를, 짧은 글에 긴 여운을 담는 이철수 판화의 힘은 책을 놓고 난 후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고 진하다. 일상사를 조용히 바라보면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내는 그의 예리한 눈은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에 충분하다. "떠있는 배 위에 탑이 실려있습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맞은편에 가볍게 내려앉았습니다. 배와 물이 살며시 움직였습니다. 새도 무게가 있습니다."
*글을 읽으면 그림에 더욱 감동 받는- 이중섭 '이중섭, 그대에게 가는 길'
요절한 천재는 신화가 된다. 천재 화가 이중섭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본에 있던 아내 이남덕(일본명 야마모토 마사코)과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을 엮은 이 서간집은 암울하고 궁핍했던 시절, 예술가이자 한 여자의 남편, 또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그의 인간적인 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가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이렇게 말했다. "돈은 편리한 것이긴 하지만 반드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하오. 중요한 건 참 인간성의 일치요. 비록 가난하더라도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부부의 사랑 그것이오"라고. '당신을 힘껏 포옹하고 몇 번이고
입맞추오' '태현, 태성에게 뽀뽀를 하나씩 나누어주구려' 등 가족을 향한 사랑은 물론 '이내 가게 될 거요' '도쿄에 가서 자전거를 사줄께' 등 지키지 못한 수많은 약속들은, 그가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병실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음을 아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그림으로 깨닫는다, 나의 진실을- 미셸 투르니에 '뒷모습'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투시해낸 감성의 오지를 김화영 교수가 한국어의 투박한 질감을 최대한 중화시켜 정치한 모국어로 돌올(突兀)하게 옮겨 놓는다. 여기에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의 정밀한 사진까지 곁들여져 있는 '뒷모습'은 그들의 숨죽인 대화를 아름답게 환기시킨다. 늘 달고 다니면서도 스스로는 결코 볼 수 없는 반역이 없는 순수한 거울, 뒷모습은 그렇게 감추지 못하는 우리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사실, 자신이 바라보고 관찰할 수 있는 진실이란 얼마나 거짓에 가까울 것인가. 진실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만질 수 없기에 더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뒷모습'은 그런 보편의 진리를 사뭇 통렬하게 깨닫고 마주치게 한다. 깊이 생각하지 말고 정직하게 바라보라. 뒷모습은 우리의 앞모습들이 감춘 세계의 진정한 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