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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고구마의 추억

 날씨가 포근하다해도 역시 겨울은 겨울이다.  자꾸 으시시 삭신이 움츠려들며 녹작지근해진다. 라면국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뱃속에 온기가 돌며 찬기가 저만치 물러가는 느낌이다. 세월의 바퀴가 굴러굴러 머리에 서릿발이 내렸지만 라면국물 맛은 예나 별반 다름이 없다. 라면이 몸에 나쁘니, 어쩌느니 말도 많지만 어디 라면처럼 친근하고 부담 없는 음식이 어디 있으랴. 양은냄비와 김치만 있으면 금상첨화다.

중학교 때 어느 날이었으리라. 생면부지의 꼬불꼬불하게 생긴 라면을 얻어먹고 나서 이게 진짜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맛’이란 것을 실감했던 기억이 난다. 먹을 것이 별로 없던 당시에는 라면을 얻어먹기가 힘들었지만, 라면이 차츰 쌀밥을 밀어내고 혓바닥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음을 하기까지는 극히 짧은 시간이었다고 본다. 엉뚱한 방향에서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의 치적이 바로 이게 아니랴 싶다. 라면의 개발과 대량 생산을 통해 만백성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는 말로만 떠돌았던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진짜 맛’을 알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꼬불꼬불하게 작은창자를 닮은 라면발이 쪼그라든 작은창자를 구원해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라면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해가 떠도 라면, 달이 떠도 라면, 라면이 최고야라고 아무리 외쳐도 틀린 노래가 아니리라. 그렇다면 라면이 없던 시절은 진짜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가히 암흑의 시절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요새 아이들에게 보릿고개 이야기를 해주면 ‘그러면 라면을 먹으면 됐지’라고 조상의 어리석음을 책망한다던데 라면으로 퉁퉁 배가 불려진 요새 아이들은 보릿고개의 진실을 이해할 수 없나 보다.

햇고구마를 쪄먹었다. 라면이 없던 그 암흑세월을 밝혀준 촛불이 그게 바로 고구마란 생각이 든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동생이랑 궁시렁궁시렁거리며 한허리 베어내어도 문풍지를 타고 부엉이 소리만 들려 올 뿐 긴긴밤은 마냥 지속되었다. 엉성하게 얻어먹은 저녁인지라 허기가 밀려왔다. 곧장 고구마 뒤주로 달려가 손을 집어넣어 잡히는 대로 고구마를 꺼냈다. 부억칼로 껍질을 깎아서 길쭉하게 잘라먹었다. 심심하면 소금을 찍어 먹기도 했다. 요새로 말하면 사과나 배를 깎아 먹는 격이었다. 

 안방의 절반은 고구마 뒤주가 점령하고 있었다. 안방만이 고구마차지가 아니었다. 밥그릇마다 고구마가 박혀 있었다. 밥에 웬 고구마가 이렇게 많으냐고 짜증을 내보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양반이었다. 점심밥이나 저녁밥에는 멀겋게 고구마를 으깬 국이 식사로 차려졌다. 이름하여 국밥이었는데 숟가락을 휘저으면 쌀알들이 춤을 추고 돌아다녔다. 무엇을 원망하랴! 그나마도 고구마 있었기에 그렇게라도 끼니를 때우고 생명을 유지한 것이다. 어디를 쏘다니다가 들어와서 배고픔을 호소하면 찐고구마를 내밀었다. 간식이다. 고구마는 식으면 식은 대로 맛이 있었다. 화롯불에 구워서 먹기도 했다. 고구마를 떡반대기처럼 얇게 자르거나 동그랗게 잘라 부젓가락을 걸쳐놓고 구으면 딱딱말랑하게 익은 표면이 쫀득쫀득한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당시에는 외양간에 소에게 쇠죽을 끓여 주었다. 쇠죽을 쑤고 난 후 아궁이에는 화려하게 불잉걸이 타고 있었다. 불잉걸 속에 커다란 고구마를 묻었다가 꺼내기도 했다. 워낙 센 불이라 고구마가 새까맣데 타기 일쑤였다. 부지깽이로 숯덩이로 변한 껍질을 두들겨 패면 노릇노릇하게 익은 속이 드러났다. 후후 불며 껍질을 까먹었다. 시꺼멓게 깜장칠을 한 상대방의 얼굴이 달콤함을 더해 주었다.

겨울날 마당에 눈이 수북하게 쌓인 날이면 고구마를 눈더미 속에 파묻었다가 얼려서 먹기도 했다. 고구마로 아이스케키와도 같은 것을 만들어 먹은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고구마의 추억은 가을 들녘길이었다. 그때쯤이면 학교에서 운동회 연습을 하느라 진땀을 뺐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 올 때면 출출한 정도가 아니었다. 신작로의 모래알들이 밥알로 보였다. 그 때도 고구마를 먹었다. 지천에 깔린 게 고구마밭이다. 임자가 보이지 않으면 아무밭이나 들어가 고랑을 꼬챙이로 후벼팠다. 같은 값이면 잘 생긴 놈을 골라 풀밭에 비비면 말끔하게 흙이 털렸다. 우둑우둑 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랬다. 물론 100% 성공은 아니었다. 성깔이 고약스런 밭주인은 몰래 숨어서 망을 보고 있다가 고구마 서리범을 잡아 족치기도 했다. 그런저런 숨바꼭질 속에서 이렇게 패러디한 시조를 읊기도 했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남의 고구마밭에 홀로 앉아/
큰고구마 옆에 차고 작은고구마 먹던 차에/
어디서 네이놈! 하는 소리에 남의 애를 끓나니//

순박한 동심은 남의 것을 서리한 죄책감과 불안감을 이렇게 달랬나 보다.

 이렇게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고구마는 육신의 생명을 이끌어준 등불임에 틀림없다. 먹을 것이 너무 많아 배에 지방질이 쌓여 성인병이 만연한다는 요새는 다이어트나 변비를 치료하는 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니 고구마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덩이뿌리라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서인지 요새 고구마는 별미다. 백화점에 가보면 고구마 몇 개 본지에 집어넣으면 만원이 넘을 정도로 값이 나간다. 시쳇말로 고구마가 폼 좀 재고 있다는 느낌이다. 온갖 구박과 천대를 무릅쓰고서 대체 식량으로서 무한한 세월을 살아온 고구마가 아니더냐. 그래, 고구마야 폼 좀 겁나게 잡아보려므나! 보릿고개나 똥배고개나 한결같이 우리 곁에 있는 고구마가 얼마나 친근하고 고맙더냐. 생김새는 못생겼지만 조신하고 마음이 따뜻한 조강지처이자 어쩐지 훈훈한 훈기를 느낄 수 있는 고구마다.

 조선시대 영조 때 일본 대마도에서 씨고구마를 얻어와 부산동해와 제주도에 처음 심어 전파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이것 또한 영조의 최대의 치적이며 역대 왕의 치적 중에도 최고가 아닐까 싶다. 인체의 위를 닮은 고구마는 진정으로 굶주린 위를 구원해준 만백성의 양식이 아니었을까. 라면이 은이라면 고구마는 금이나 다이아몬드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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