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이야기다. 50대 아빠와 10대 딸, 부녀지간 정(情)이 두터울 듯도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
얼마 전,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용건은 그 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너무 좋아 아예 고교과정과 대학을 거기서 마칠 터이니 허락해 달라는 거였다. 나의 대답은 “안 돼”였다. 정해진 1년을 마치면 귀국하여 우리나라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딸 대답이 걸작이다. “나, 아빠 딸이잖아! 아빠는 딸이 원하는 것 들어주어야 되잖아?”이다. 혈연에 호소하고 아빠의 의무를 강조한다. “응, 아빠 딸 맞지. 그러니까 아빠말 들어야지? 귀국해서 아빠와 진로를 다시 이야기하자.” 간신히 달래서 통화를 마쳤지만 대화는 늘 이런 식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아마도 딸이 시험공부 중이었나 보다. 신경이 예민해서인지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면서 거실에서 부부간의 대화, TV 9시 뉴스 시청을 막는다.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보통의 부모라면 어떻게 할까? 아마도 딸의 요구대로 대화는 다른 방에서, TV는 곧바로 끌 것이다.
아내는 딸이 하자는대로 했으면 하는 눈빛이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부모도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고 일상생활이 있는데 그것까지 희생해 가며 딸의 비위를 억지로 맞추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 그것이 진정으로 자식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시험공부는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부모 일상까지 제약을 가하면서 집안 분위기를 자기 위주로 맞추어 달라고 요구해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이다. 어찌보면 매정한 아빠다. 딸의 기특한 향학열 욕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아빠가 되고 만 것이다.
“아빠, 막내 고모는 선희 언니가 원하는 것 다 들어 주잖아?”
딸도 어디서 듣긴 들었나 보다. 자식이 고3이 되면 집안식구 모두 대학입시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받들어 모셔’한다는 사실을. 부모는 자식을 위해 무조건적인 헌신과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응, 그것은 그 집이야기고 우리집은 다르지.” 딸의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있다.
과연 어느 것이 올바른 가정교육인가?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부모는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하는가. 경제적 뒷받침은 물론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자식을 키우면 훌륭하게 성공할까? 부모의 고마움을 알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할까? 요즘 세상에 자식에게 보답을 바라는 부모는 없긴 하지만.
한 번 냉철히 생각해 보자. 자식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금이야 옥이야’ 하며 자식을 기르는 것이 과연 옳단 말인가? 심지어 자식에게 설거지 시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니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나 한다.
부모의 헌신과 봉사, 좋은 말이고 지고(至高)의 가치이다. 그러나 부모로서 쌀쌀맞기는 하지만 당장은 섭섭하고 부모 원망도 듣게 되지만 자식에게 오히려 부모 나름대로의 삶의 세계를 알게 하고 부모의 삶도 자신의 삶처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사랑하는 우리 딸이 소중한 건 변함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