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처음 만나는 시간에는 조금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아이들도 교사를 살피고, 교사도 아이들의 표정과 반응을 살핀다.그 어색함을 오래 끌고 가지 않으려고, 수업 내용으로 바로 들어가기보다 아이들이 한 번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곤 한다. 한 번은 외계인 이야기를 했다.롯데타워에서 쏘는 레이저를 타고 우주선에 다녀왔는데 너무 피곤하다고 말하자 아이들이 금방 웃기 시작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눈빛이 달라진다.반응이 좋으면 조금 더 간다. 어설픈 춤도 추고, 우스운 목소리도 낸다.아이들은 좋아하지만 정작 말하는 사람은 민망해진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교사라는 자리는 괜히 조금 점잖아 보여야 할 것 같을 때가 있다. 너무 가볍게 보이는 건 아닐까 싶고, 일부러 우스운 모습을 보이는 일이 어색할 때도 있다.그래도 그런 시간이 한 번 지나고 나면 아이들의 반응이 달라진다. 쉬는 시간에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아이가 생기고, 다음에는 또 무슨 이야기를 해줄 거냐고 묻는다. 수업 시간에도 전보다 질문이 조금 늘고, 교사의 눈치를 보던 아이가 편하게 반응하는 순간이 생긴다.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수업 내용만 듣는
“우리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요?” 무대에 오른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작은 몸짓 하나, 친구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 한 곡에도 박수가 쏟아졌다. 서로 사용하는 언어와 살아온 문화는 달라도 자녀의 성장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23일 경기 시화유치원(원장 장영순)에서 열린 ‘Play-RAS 교육과정 발표회’의 풍경이다. 이번 발표회는 경기교육청의 핵심 교육정책인 독서(Reading)·예술문화(Arts)·스포츠(Sports), 이른바 RAS를 유아교육과정에 접목해 아이들이 그동안 배우고 경험한 것을 무대에서 표현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유치원에서는 공개수업, 가족 운동회, 아나바다 시장 등 학부모가 참여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이날 발표회는 조금 특별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통해 부모들이 평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자녀의 성장을 확인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는 부모들도 바쁜 일정을 조정해 객석을 채웠다. 한 학부모는 “아이가 유치원에 다닌 3년 동안 정말 많이 컸다는 걸 새삼 느꼈다”며 “사람들 앞에 서는 건 어른도 떨리는 일인데,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무언가를
상담을 하다 보면 아이 이야기보다 먼저 부모의 얼굴이 들어오는 날이 있다.초등학교 1학년, 또래보다 체격이 큰 남자아이의 어머니와 처음 마주 앉는다.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어머니의 표정에는 걱정이 먼저 묻어 있다. 체격이 큰 아이는 같은 행동을 해도 조금 더 크게 보일 때가 있다. 친구와 장난을 하다가 부딪쳐도 먼저 눈에 띄고, 같은 목소리로 말해도 더 거칠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어머니도 그동안 비슷한 일을 여러 번 겪었을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바로 꺼내기보다는 다른 이야기부터 시작하곤 한다. 그래야 부모도 ‘우리 아이가 또 무슨 잘못을 했을까’ 하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체격이 커서 그동안 오해받은 일도 있었겠어요.” 어머니가 잠시 나를 바라본다. “조금만 부딪혀도 다른 아이보다 더 크게 보였을 것 같아요.” 그제야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풀린다.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저도 아이를 잘 살펴볼게요.” 이런 이야기를 먼저 나누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한결 편해진다.상담을 할 때마다 한 가지는 늘 염두에 두려고 한다. 엄마가 집에서 보는 아이와 교사가 학교에서 보는 아이는 생각
한 개의 종이컵에는 빨간 물감을 풀고, 나머지 스물세 개의 컵에는 맑은 물을 담았다. 중학교 3학년 남녀공학 학급에서 진행한 성매개감염병 예방교육의 도입 부분이었다. 한 개씩 들고 서로 물을 조금씩 주고받았다. 한 사람이 다섯 명과 섞도록 하자, 음악이 끝나기도 전에 모든 컵이 빨강빛을 띠었다. 처음에는 단 한 컵에만 있던 색이 여러 사람의 연결을 따라 퍼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염을 상기시키는 동기부여로 진행한 것이었다. 활동의 핵심은 겉모습만으로 감염 여부를 알 수 없으며,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의 관계는 빠르게 성매개 감염병이 옮겨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부여한 것이다. 성매개감염병 가운데는 감염되어도 증상이 없거나 뚜렷하지 않아 스스로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따라서 ‘멀쩡해 보이니까 괜찮다’는 생각만으로 안전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걱정되는 상황에서는 증상이 없어도 의료기관으로 이어지는 'Do Test'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중학교 시기는 신체적·정서적 변화와 함께 관계의 폭이 넓어지는 때다. 이 시기의 예방교육은 앞으로 마주할 상황에서 자신과 상대의 건강을 지키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제공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누구나 부담 없
4년 전 장애인의 날에 열린 음악회에서 3명의연주자와 함께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한 장애우단체에 소속된 피아니스트와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자였다. 그날 무대 뒤에서 피아노 연주모습을바라보다가 잠시 놀랐다. 악보가 놓여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피아니스트는 그 많은 곡을 모두 외워 연주하고 있었다. 건반 위로 흐르는 선율을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아 오래기억되고 있었다. 최근 그들이한 도시의 지역방송교향악단과 협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음악을 기다리는 설렘이 공연장 입구부터 가득했다.막이 오르고, 방송으로만 보던 지휘자를 눈앞에서 만났다. 지휘자의 곡 해설은 음악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소프라노의 노래와 색소폰의 음색, 피아노의 선율이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질 때마다 객석의 감동도 깊어졌다. 피아니스트는 약 27분 동안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제21번 다장조」를 암보로 연주했다. 수많은 음과 쉼,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추는 순간들이 그의 손끝에서 이어졌다. 관객들은 그 선율에 깊이 빠져들었다.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시각장애를 안고 그 긴 곡을 연주
“건네주신 감, 잘 먹겠습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도 감 몇 알에 담긴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누군가에게는 가을이면 흔히 만나는 과일이겠지만, 내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한 사람의 정성을 함께 건네받은 선물이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도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에서 열리는 감을 우리는 ‘고동시’라고 불렀다. 나무에 매달린 감이 붉게 익어 홍시가 되면, 그 달고 부드러운 맛으로 가을이 왔음을 느꼈다. 감이 익기 한참 전부터 감나무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내주었다. ‘감똘개’라 부르던 감꽃을 지푸라기 끈에 엮어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녔으며하나씩 따 먹으며 나무 아래를 맴돌았다. 꽃은 놀이가 되고 열매는 먹거리가 되었다. 감나무는 그렇게 어린 날의 몸과 마음을 함께 키워 주었다. 큰 나무에서 거둔 감은 곶감으로 말리고 홍시로 익혀 겨우내 먹을 간식으로 갈무리했다. 집안에 특별한 날이 있으면 어머니는 직접 팥시루떡을 만드셨다. 방앗간에서 빻아 온 쌀가루와 삶아 으깬 팥을 켜켜이 시루에 안치고 김을 올리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시루떡 위에 장독에 보관해 둔 살얼음 낀 홍시를 얹어 먹던 따뜻한 떡과 차가운 홍시가 입안에서 어우러지던 맛은 어머
대학 강의실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학령인구가 줄어드는 가운데, 사회생활을 하다가 다시 배움의 길로 들어선 성인 학생과 외국인 학생들이 대학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고 있다. 내가 맡았던 강의실도 절반가량은 사회생활을 경험한 학생들이었다. 자녀가 결혼할 나이가 된 학생도 여럿 있었다. 자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떡을 가져와 함께 나누는 날이면, 강의실에는 수업 이야기와 더불어 살아온 날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을 다시 책상 앞에 앉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가정과 일터에서 이미 많은 역할을 감당해 온 이들이 낯선 전공 용어를 익히고, 과제를 준비하고, 시험을 치르는 수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슬로의 욕구 단계 이론은 인간의 욕구를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과 소속 욕구, 존중 욕구, 자아실현 욕구로 설명한다. 그 가운데 자아실현은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펼쳐 가려는 욕구이다. 배움으로 하나를 이루면 다음 가능성이 보이고, 어제보다 성장한 자신을 만나면 또 다른 도전을 꿈꾸게 된다. 내게 성인 학생들의 학구열은 이러한 성장의 욕구가 삶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해가 일찍 저무는 겨울날의 수업이었다. 창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