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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아카시아꽃 향기 봄 햇살에 바랜 지 오래다. 찔레꽃, 감꽃, 백화마삭줄꽃의 재스민 내음이 섞인 초여름 향기가 녹음으로 짙어지는 유월이다. 가는 봄이 아쉬운지 하늬바람은 산과 들의 짙은 녹음을 흩어 놓는다. 시간의 흐름은 빠르다. 일 년 열두 달을 사람의 평균 수명인 80살로 비교해 본다면 유월은 불혹에 가까운 계절이다.

 

유월은 고양이 손을 빌릴 정도의 농번기이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논밭은 마늘보다 보리를 많이 심었다. 농사철만 되면 들녘은 부산했다. 들에서 갈무리한 보릿단을 집 마당이나 타작마당에 내는 일은 순전히 인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집 저집 원동기와 탈곡기 도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철에 어른들은 바쁘지만, 아이들은 일손도 도우며 자연을 벗 삼아 놀기도 했다.

 

 

며칠 전 산책길이었다. 지난 4월 말, 연한 연두색 새 이파리로 가슴을 아리게 한 감나무의 잎은 짙은 녹색으로 두꺼워지며 잎사귀 사이에 아기 감을 달고 있다. 혹시나 감꽃이 떨어져 있으려나 주변을 둘러보니 갈색으로 변한 꽃밖에 없다. 감꽃이 떨어지면 봄은 가고 초여름이 시작된다. 떨어진 감꽃을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수꽃이 먼저 피어서 암꽃을 기다리는 기본 매너에, 암꽃이 열매 맺는 것을 지켜보다가 암꽃이 떨어지면 뒤따라 떨어지는 자상함이 수꽃 중에 최고가 아닐까 한다.

 

감꽃의 꽃말은 경의, 자애, 소박이다. 5, 6월 황백색으로 1년생 가지잎 겨드랑이에 달린다. 꼭지 없이 화관만 떨어진 꽃은 암꽃이고 화관과 꽃받침이 함께 떨어진 꽃은 수꽃이다. 먹을 부분은 암꽃이 많다. 감꽃은 임금님 모자 같이 생겼으며 촉감은 아기 고사리같이 촉촉하다. 그리고 색깔은 달빛 속 여인의 젖가슴처럼 뽀얗다. 시들시들하게 말려서 먹으면 떫은맛과 단맛이 어우러지지만, 그냥 먹으면 떫은맛이 난다.

 

 

유년의 오뉴월은 먹을 게 마땅찮았다. 그래서인지 감꽃을 군입거리로 삼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감나무가 없었다. 대신 뒷집의 대문간에 커다란 돌감나무가 있었다. 그 감나무의 꽃은 연노랑 의 작고 길쭉한 간장독을 닮은 수꽃이 대부분이었다. 이 감나무 밑은 동네 조무래기들의 놀이터였다. 아카시아 꽃비가 고요히 그치고 초여름 바람이 나뭇잎을 살며시 스치면 감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밤새 바람이라도 불면 감꽃들은 새벽 땅 위에 수북이 내려앉는다. 그 한 송이 갓 떨어진 꽃을 주워 입에 넣으면 달콤하고 향긋함이 혀끝에서 환희로 피어난다. 그 맛을 먼저 보려고 이른 새벽 댓바람에 선잠 깬 얼굴에 토끼 세수하고 감나무 밑으로 눈을 비비며 감꽃을 줍는다. 금방 떨어진 것은 떫은맛이 있어서 무명실이나 각시풀에 꿰어 한 개씩 따먹었다. 감꽃 맛은 꽃송이란 꽃받침을 함께 먹어야 더욱 싱그럽고 상큼하다.

 

감나무 밑은 꿈이 있었다. 대나무로 만든 평상에서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감꽃을 실에 꿰었다. 목걸이도 만들고, 팔찌도 만들고, 화관도 만들어 머리에 올렸다. 꽃잎이 닿는 이마 위, 살짝 차가운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놀이도 싫증이 나면 우리는 돌멩이 집을 짓고, 감잎을 모아 작은 밥상을 차리며 어른 흉내를 내는 소꿉놀이도 했다. 그러고 보면 감꽃은 말없이 그 시절을 지켜보던 작고 향기로운 증인이라 할 수 있다.

 

갈색으로 감꽃이 지면 푸른 배꼽이 살포시 보인다. 이제 여름 햇살을 받아 풋감으로 자라고 있다. 장마가 지나고 칠월의 햇살을 받은 토실토실한 풋감은 더러는 툭툭 떨어진다. 그러면 풋감을 주워 냇가로 간다. 반반한 자갈돌 위에 옷가지 벗어놓고 첨벙첨벙 물놀이에 정신을 다 빼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높은 곳에 올라가 다이빙하기도 하고 또, 가져간 감을 저 멀리 던져놓고 물속에서 눈을 뜨고 그 풋감을 찾아다닌다. 물에 오래 있다 보니 풋감의 떫은맛은 사라지고 특유의 감 맛만 났던 기억도 있다. 물놀이를 다 하고 난 뒤 돌멩이 위에 놓고 주먹으로 풋감 깨어서 나눠 먹었던, 떫은맛 없애려고 소금에 찍어 먹던 오래전 기억이 새롭지만, 이제는 돌릴 수가 없다.

 

 

지금 아이들이 사는 시대는 먹을 것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감꽃이 피어도, 아카시아꽃, 인동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만큼 아이들의 감성은 떨어지고 바쁘다. 늘 조급하게 학원에, 선행학습에 경쟁만 배우고 살아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아이들에게 컴퓨터 모니터가 아닌 자연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쉬운 것 없이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풍족한 시대지만, 우리가 가졌던 그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들을 가르쳐 주고 싶고 느끼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아쉬울 뿐이다.

 

감나무에는 분명히 시간을 거슬러 우리 유년의 기억을 환하게 해주는 화수분 같은 분명한 마력이 있다. 그러나 지금 시골 마을 어디를 가나 감은 그저 감일 뿐 아이들에게 어떤 기억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언제부턴가 감나무가 사람들로부터 잊히기 시작했다.

 

오늘도 우리가 기억하는 고향의 감나무들은 밭 귀퉁이에나 논두렁, 더러는 허물어진 담장에 기대어 서 있다. 감나무는 세월의 풍상에도 언제나 아낌없는 주기만 하는 나무요, 고향의 품처럼 넉넉하고 아름다운 나무다. 그 계절 그날들 나의 어린 시절, 작디작은 감꽃이 엮어준 추억의 시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랑스럽고 순한 동화의 한 페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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