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健忘症) [명사]<의학> : 경험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어느 시기 동안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또는 드문드문 기억하기도 하는 기억 장애
국어사전에도 버젓이 올라있는 의학용어 건망증! 날 궂으면 찾아오는 관절염처럼 학기초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나의 고질적인 만성 질병이다.
“어, 내 USB?” “어, 내 다이어리?” “어, 내 가방?”
혼자 있을 때는 애지중지 하는 것들이건만 바쁠 때는 이상하게도 그 존재여부도 생각나지 않는 물건이다. 아이들과 부대끼는 학교일과시간에는 그저 잘 있으려니 했다가 퇴근할 때쯤이면 눈에 불을 키고 제일 먼저 찾게 되는 애장품이다. USB는 내 목에, 다이어리는 책상 위에, 가방은 의자 품에 얌전하게 있으려니 생각한 것들이 없을 때는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그제서야 소중함이 와락 밀려와서 눈물나게 찾아다니곤 한다.
USB는 이 셋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아끼는 애물이다. 글을 취미로 삼는 나의 창작물이 다 들어있는 탓이다. 짬날 때 끄적거린 온갖 종류의 잡문이 손가락만한 이동디스켓에 저장되어 있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고 간이 덜컥 내려앉는다.
다이어리는 일을 놓치지 않도록 메모를 해둔 기록장이다. 학급경영, 학교업무를 년월일별로 메모해둔 것인데 이것이 없으면 일의순서가 뒤죽박죽 되어 하루종일 헤맨다. 이런 날은 부지깽이 덤비듯 바빠도 정작 제대로 한 일은 하나도 없다.
니멋도 내멋도 없는 큼지막한 가방은 나의 세 번째 애물이다. 예뻐서가 아니라 USB와 다이어리를 담는 그릇이다보니 애장품 대열에 낀 것이다. 커다랗기 때문에 눈에 잘 띄는데 그것이 안보이면 하루종일 내가 돌아다닌 곳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찾아 해맨다.
이런 나의 깜빡병을 아는 동료들은 ‘복사기 위에 놓아둔 다이어리 정선생거 맞지? 교무실에 돌아다니는 새교실 그거 선생님거 아냐?’하면서 친절히 일러준다. 하지만 툭하면 결재를 받으러 왔다가 서류를 놓고 가는 못말리는 내 버릇을 고치려고 교장선생님께서 딱 한번 장난을 치신 적이 있다. 부하직원의 건망증을 치유해주고 싶었겠지만 되려 배의 시달림을 받으셔야 했다. 내가 아무데나 두고 찾지 못하는 물건도 교장선생님이 숨겼다고 믿고 내놓으라고 성화를 해대었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정수기 위에 놓아두었을 때도 다이어리를 수족관 위에 올려놓았을 때도... 대학원 스승님이시기도 한 교장선생님께서 난처해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철없는 제자의 건망증을 염려하는 마음도 더불어...
그래도 신기한 것은 그렇게 아무 곳에나 두고 다니는데도 나의 애장품을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냉장고에 핸드폰을 넣은 적도 없고...
너무도 바빠서 눈부시게 싱그런 푸른 하늘 한 번 쳐다볼 틈이 없는 학기초에 나처럼 툭하면 깜빡 깜빡 잃어버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재미로 보는 건망증」진단을 해보기 바란다. 증세가 심각할거라고 예상했던 나는 다행스럽게도 초기라서 한숨 놓았다. 휴우~
재미로 보는 건망증 진단
1.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낼 때 - 냉장고 문을 연다. 뭘 꺼내려고 했었는지 한참을 생각한다. 고기를 꺼내고, 냉장고 문을 닫는다. [초기] - 장농 문을 연다. 옷을 꺼내 입는다. 정육점에 가서 고기를 사온다.[중기] - 냉장고가 어디 있는지 찾는다. [말기]
2. 중국집에 자장면을 시킬 때 - 열심히 중국집 전단지를 찾는다. 114에 전화해서 물어본다. 전화기 옆에 붙여 놓은 전단지를 보고 자장면을 주문한다. [초기] - 중국집으로 가서 전단지 한 장을 얻는다. 집 근처 구멍가게에 들러 집으로 온다. 전단지를 휴지통에 버리고 짜파게티를 끓여 먹는다. [중기] - 중국집에 전화를 건다. 철수네 집이냐고 묻는다. 죄송하다고 하고 끊고 잔다. [말기]
3. 친구(숙이)에게 전화걸 때 - 휴대폰에 입력된 번호를 찾는다. [초기] - 휴대폰을 찾는다. [중기] - 친구(숙이)한테 전화해서 물어본다. [말기]
4. 담배 필 때 - 담배를 거꾸로 물고 불을 붙인다. [초기] - 담배를 거꾸로 물고 라이터를 찾는다. [중기] - 라이터를 물고 담배를 찾는다. [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