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산행 즐거움의 하나, 관찰력이 두 배라는 것. 수원에 있는 광교산(光敎山. 528m)을 자주 찾는다. 지난 토요일, 처음 가는 등산로에서 있었던 일. “여보, 이리와 봐! 꽃이 낙엽 속에 숨어있네?” 뒤따라오던 아내가 부른다.
낙엽을 헤치고 보니 가느다란 두 줄기 사이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어른손톱만한 자주색꽃 하나가 보인다. 앞서던 내가 “산에 웬 고구마 순이 있지?”하면서 그냥 지나치던 식물이다. 서서보면 잎만 보이지 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엎드려야 볼 수 있다. 만져보니 어느 정도 단단함이 느껴진다. 여느 꽃처럼 연약하지 않다.
자세히 보니 두 줄기가 있어야 그 사이에 꽃이 하나 핀다는 사실. 주위를 살펴보니 이 식물이 곳곳에 자생하고 있다. 한 군데 무더기로 피어난 곳을 보니 줄기가 모두 열 두개. 그렇다며 꽃은 몇 개일까? 낙엽을 헤치며 두 줄기 사이에 있는 꽃을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정확하다. 근처에 있는 한 줄기 잎사귀 밑을 살펴보니 꽃이 없다.
귀가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여보니 그 식물은 ‘족도리풀’. 작고 동그란 꽃 모양이 시집갈 때 색시가 머리에 쓰는 족두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처음 보는 야생화를 발견, 줄기와 잎, 꽃을 관찰하고 그 이름을 알고 그 특성까지 아는 즐거움. 산을 찾는 이유 중의 하나다.
족도리풀, 이름도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그 이튿날, 그 꽃이 보고파 카메라를 들고 그 장소를 또 찾았다. 여러 장 촬영하면서 정(情)이 붙는다. 가르침도 얻는다.
인간 세상에서 ‘꽃’하면 드러내놓고 뽐내면서 벌과 나비를 유혹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잎, 줄기보다 높이가 낮고 땅에 붙어있다. 자신을 자랑하려 하지 않는다. 색깔도 화려하자 않다. 겸양지덕, 겸손한 꽃이다.
이 꽃을 보려면 허리를 숙이거나 엎드려야 보인다. 눈높이를 낮추어 줄 때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꽃 대부분이 대개 낙엽에 감추어져 있다. 자신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또, 아무리 줄기가 굵고 잎이 크더라도 줄기가 하나인 것에는 꽃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 인간사에서 다 큰 성인이라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있으면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이 식물은 곤충을 위해 좋은 일도 한다. 애호랑나비는 유독 족도리풀에만 알을 낳는데 이른 봄 풀잎 뒷면을 들춰 보면 에메랄드 빛의 작은 애호랑나비 알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알에서 깬 애벌레는 이 풀잎을 먹고 자라는데 숲에서 족도리풀이 사라지면 애호랑나비도 사라진다는데….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제 무더기로 피어나 꽃 6개를 세었던 장소에 가 보니 족도리풀 흔적만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심성이 왜 이리 잔인하단 말인가! 혹시, 뿌리를 캐어 약재로 쓰려고? 산을 찾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무더기로 피어난 족도리풀이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