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삶을 담아 놓은 그릇과 같다. 그것이 현실의 아픔을 노래하든 개인의 정서를 노래하든 말이다. 더구나 과거 숱한 투쟁과 현실의 질곡을 노래한 사람이 세월이 흘러 그 마음을 완곡한 곡선으로 그려 놓았어도 그 과거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그래서 시이건 산문이건 어떤 사람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그 사람의 마음이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독자의 마음에도 젖어 공유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겨울 공화국>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등을 비롯한 많은 시집을 낸 양성우 시인의 <길에서 시를 줍다>가 그렇다. 이 시집에서 시인의 감정은 아침이슬에 젖은 풀잎처럼 낮아졌다. 소리를 낮추고 감정을 낮추면서 시대의 아픔이나 부조리를 직접 말하기보단 지나왔던 것에 대한 그리움과 가까운 것에 대한 사랑, 그리고 눈물 어린 마음을 잔잔하게 노래하고 있다.
오늘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안에 넘치도록 가득 찬 너.
네가 있으므로 나는 너무나도 행복하다.
내가 네 안에서 모조리 부서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구나.
매우 짧은 만남도 기쁨이 된다면,
시간을 넘어서 이어지는 끝없는 만남은
그 기쁨이 얼마나 클까?
오늘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만나고 돌아서도 언제나 다시 만나고 싶은
너.
- <오늘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모두 -
사람들은 매일매일 누군가와의 만남을 갈구한다. 늘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내 마음 안에 넘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매일 누군가를 만나면서도 또 다른 만남을 소망하는지 모른다. 허면 시인이 말한 아름다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내 슬픔도 기쁨도, 내 먼지도 이슬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데 시인은 시간을 넘어서 이어지는 끝없는 만남을 소망한다. 과거와 현재의 만남일 수도 있고, 과거의 사심 없는 진실과의 만남일 수도 있다. 허면 지금 시인에겐 그 아름다움 만남이 부재하다는 것이 아닐까.
저녁 어스름이 깔린 청와대 앞길을 걷는다.
드높은 담을 따라 나란히 선 큰 나무들이
을씨년스럽다.
웬일인지 중심에 선 사람들이 세상을 흔드니,
기우는 나라에 이미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들까지도 그 넋을 팔았느냐?
차라리 풀숲에 숨어서 우는 풀벌레라며
스스로 어느 바람의 앞잡이가 된들 누가 탓하랴.
아무도 한꺼번에 먼눈으로 깎아지른
벼랑을 보지 못한다.
그곳이 비록 죽음보다 더 깊은 곳일지라도.
칼끝 같은 검푸른 잎들의 희롱이 넘치고
온갖 교만이 무리지어 흐르는 이 길,
전혀 터무니없이 옳지 않은 것들 앞에서는
목숨을 걸고 맞서는 젊은 옛사람들이 그립다.
- <청와대 앞길에서> 모두 -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시끄럽고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힘깨나 쓰는 자, 글깨나 읽는 자, 돈깨나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글 아는 자'들은 세상에 병폐가 된다고 해 모조리 섬에서 떠나게 했는지 모른다.
시인은 담 높은 청와대 앞길을 걸으면서 작금의 어지러운 현실과 이 땅 지식인의 비겁함과 온갖 교만이 흐르는 권력의 모습을 떠오르며 젊은 옛사람들을 그리워한다. 그들은 불의에 대해 어떠한 욕심 없이 목숨을 걸고 맞섰던 자들이다. 시인도 한때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헌데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은 나이가 든 그때의 젊은 사람이나, 지금의 젊은 사람이나 옳지 못하는 것에 목숨 걸고 맞서는 자가 얼마나 있는가. 세상의 변화 속에 사람도 변하는 게 이상할 게 없지만 그래도 시인은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옛날이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땐 뜨거운 열정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사람들과 열정 그리고 그때 호흡했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은 시 여러 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듯 드러난다. 그러나 과거의 시편들처럼 분출하지는 않는다. 나직하면서도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게 읊조린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은 이 시의 표제이기도 한 <길에서 시를 줍다>에 잘 드러난다.
나는 길에서 시를 줍고 숲에 가서 낳는다.
숲 속에서 아기를 낳던 옛 인디언 여인들처럼.
매우 뼈아픈 삶이 시를 만들고
깊은 시름이 노래가 된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로 인한 허망함이여.
나를 흔들지 마라.
내가 어둔 길을 홀로 걷고,
얼음 위에 누워서도 꿈을 꺾지 않음은
굳이 한 순간만을 살고자 함이 아니니,
눈물을 머금고 숨죽여 읊은 나의 시들이
손톱만큼도 세상을 못 바꿀지라도 무슨 상관이냐.
아무도 없는 거친 길 위에서 줍고,
오랜 몸부림 끝에 내 몸으로 낳은 것들이라면.
- <길에서 시를 줍다> 모두 -
시인은 말한다. 손톱만큼도 세상을 못 바꿀지라도 자신의 말들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면 참 좋겠다고. 아니 그것보다 자신의 시들이 읽는 이들에게 작은 기쁨이 되었으면 감사하다고.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고 염려하는 여러 사람의 눈물겨운 마음이 힘이 되어 자신을 지금까지 서있게 했다고.
시인의 말처럼 '뼈아픈 삶이 시가 되고 깊은 시름이 노래가 된다.' 그러나 그 아픈 삶과 시름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시가 단순히 머리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랜 몸부림 끝에 몸으로 낳은 것'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