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길 아침을 반겨주는 까치 소리, 날마다 만나는 1학년 우리 반 아이들, 2층 교실 밖으로 멀리 보이는 바다 풍경 뒤로 드러 누운 산들. 가을 날씨 답지 않게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여름 방학 동안 웃자란 풀밭이 깨끗하게 이발을 했는데 깎여 나가지 않고 살아 남은 나팔꽃은 생존의 기쁨을 노래하며 하늘을 향해 웃고 있다.
그러고 보니 1학기 내내 교실 밖 창가에 서 있는 시계탑 위에서 아침마다 노래를 부르던 참새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반 아이들이 아침 독서를 할 때마다 저도 같이 공부를 하는 지 참견을 하곤 했던 참새 한 마리였는데 보이지 않으니 새삼 녀석의 소식이 궁금하다.
날마다 볼 것 같은 익숙한 풍경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 귀여운 이 아이들을 곁에서 볼 수 있는 시간도 한정되어 있다. 아이들은 자라서 내 곁을 떠나간다. 내 자식들이 그랬던 것처럼.
입이 닳아지게 참새처럼 선생님을 부르는 저 목소리들은 나이테가 긁어질수록 잦아들 것이다. 그 목소리는 점점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향한 부르짖음으로 변해 가리라.
까만 눈을 맞추고 가까이 다가와서 내 팔을 잡아 흔들던 손길은 점점 줄어들어 더 넓은 세상으로 더 큰 원을 그리며 반경을 넓혀가리라.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일상의 작은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되돌아보니 그것들이 쌓여서 내 시간의 지층을 만들고 든든한 바위처럼 내 삶의 언덕을 받쳐 준다고 생각하니 순간의 행복을 소중히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밥 한톨, 반찬 하나까지 꼼꼼히 반듯하게 다 먹고 나가는 의젓한 꼬마들. 이를 닦고 가방을 메고 인사까지 예쁘게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추수를 앞둔 농부처럼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만 같다.
날마다 볼 수 있을 것 같은 이 작은 일상의 행복을 기록하지 않으면 오늘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 점심 시간을 이용하여 자판 앞에 앉았다.
문득 오늘 아침 수업 시작 전에 아침 독서 시간에는 다른 친구가 독서하는 것을 방해 하지 않도록 조용히 해 주며 다른 사람을 생각해 주는 마음을 두 글자로 말해 보라고 했더니, 한 번 들은 내용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해내는 은혜가 '선생님, 배려입니다." 라고 대답해서 얼마나 기쁘던지 군자의 삼락을 느끼기도 했었다.
"아니, 어떻게 생각해 냈지?" "예, 선생님. 1학기에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잖아요."
"그래요. 여러분들이 학교에 와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책을 많이 보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며 상대방을 위할 줄 아는 배려를 배우기 위한 것이기도 해요. 복도를 다닐 때 발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나, 급식실에서 얌전히 밥을 잘 먹는 것, 아침 독서 시간에 책을 뒤적이고 시끄럽게 하지 않는 것,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도 모두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거랍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어린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혼자만 잘 살고 공부만 잘 하는 사람보다는 다른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고 위해 주는 배려하는 어린이가 훨씬 예쁘답니다. 우리 반 모두 그런 어린이가 될 수 있지요?" "예! 선생님."
여덟 살 짜리 아이들에게 '배려'를 가르치고 실천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그런데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감수성이 예민해서 더 잘 받아들인다. 사소한 일로 친구가 울때 사과하라고 하면 사과도 하기 전에 울어버린다. 우는 그 아이의 심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 같이 우느냐고 물으면, 그냥 슬퍼서 운다고 한다. 배려의 차원을 넘어서 감정이입의 상태까지 이르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우는 아이 앞에서 웃지도 못하고 마냥 부럽다. 나도 그들처럼 순수해지고 싶어서다.
여덟 살짜리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면, 우리 어른들도 그렇게 아이들처럼 단순해진다면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작은 개구리 한마리, 개미 한 마리에게도 깊은 애정을 느끼고 소중히 하는 아이들처럼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안경을 끼고 싶다. 아니, 인간에게 필요한 감정들은 여덟 살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정직하고 착해서 도무지 이기적인 계산에는 서툰 아이들처럼 세상이 그런 어른들로 채워진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엉뚱한 상상에 사로 잡히게 하는 우리 반 아이들이 있어서 나는 날마다 행복한 일기를 쓴다. 그리고 나의 무디어진 감정들, 닳아빠진 이성도 퇴화해서 아이들처럼 살고 싶다.
1학년 아이들은 천사이다. 나는 그 천사들이 쏟아내는 천상의 언어들을 메모하기 위해 수업 시간마다 귀를 씻어둔다. 그리고 이렇게 천사들이 남겨둔 씨앗을 내 가슴에 심는 이 시간을 한없이 사랑한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배려'를 덕목으로 가르쳐도 따라올만큼 의젓해진 것이다. 아니, 그 아이들의 마음 밭에는 이미 그 씨앗이 심겨져 있었으리라. 나는 그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도록 거름을 주고 때에 맞춰 적당히 물을 주는 귀밝은 농부가 되어야 함을 깨닫는다. 벼논의 벼들이 농부의 발길만큼 자라듯, 아이들도 나의 손길과 눈길만큼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