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먹고 자랄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답도 없는 막연한 질문을 던져놓고 생각의 허공을 휘젓다 보면 거미줄에 걸린 여러 마리의 날벌레처럼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사랑? 관심? 질책, 지식?, 강요? 이해? …’
단어의 벌레들이 윙윙거리지만 딱히 어떤 한 가지라고 말하기가 뭐하다. 어찌 보면 이런 모든 것들이 상황에 따라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에게도 그랬다. 이야길 나누면 스스로 ‘저 철 하나도 없어요.’ 하던 그 아이는 한 마디로 문제 학생이라는 찍힘을 당한 아이다. 많은 이들이 그 아이를 두고 말한다. 말을 안타는 아이, 눈 뻣뻣이 뜨고 대드는 아이, 뉘우침이 없는 아이, 개선의 기미가 전혀 안 보이는 아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아니야, 많이 좋아졌어. 표정도 얼마나 밝아졌는데.’ 하면 말하는 사람만 이상하게 되는 아이다. 그 아이가 이번에 나를 무색하게 만든 사건이 또 일어났다. 흡연하다 근신 받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걸린 것이다.
“저 전학가래요. 용서할 수 없데요.”
아이는 울면서 말했다. 그러면서 ‘저 갈래요.’ 한다. 전학을 가겠다는 소리이다. 그 아이를 데리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내 이야기부터 꺼냈다.
“난 너 전학보내기 싫다. 니가 전학 간다는 것은 스스로 원해서 가는 것이 아니잖아. 떠밀려서 가는 거지. 그럼 여기서 문제가 있어 갔는데 그곳에선 잘 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거야. 그리고 너 전학가라고 한 것은 진심이기보단 니가 각성을 하고 진실성을 보이라는 소리일거다. 스스로 뉘우칠 생각은 안 하고 떠밀리듯 가는 건 회피밖에 안 돼. 너도 그건 잘 알잖아. 안 그래?” “네. 그치만 벌 받는 것도 싫어요.” “이 답답한 녀석아. 넌 벌이 무섭기도 하겠지만 너 스스로 자신이 없기 때문이야. 담배 끊을 자신도 없고, 학교생활 성실하게 할 자신도 없기 때문이야. 지금처럼 그냥 대충거리면서 생활하고 싶기 때문이야.” “나도 알아요. 근데 싫은 걸 어떡해요. 그리고 선생님하고 약속한 걸 지킬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장시간 동안 이야길 끝내고 다음 날 아이는 전학 갈 학교를 알아본 것 같았다. 그런 아이의 얼굴을 보니 화가 나기 보단 가여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실 그 아이와의 첫 만남은 그리 좋지 않았다. 새 학기 첫날 학교에 오지 않았고 늘 지각을 했다. 표정은 항상 어두웠고 말대답은 차가웠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어쩌다 상담을 하려하면 얼굴을 돌리고 말했다. 그런 아이에게 뭐라고 혼을 내면 아이는 본능적으로 저항적 자세를 취했다.
그런 아이의 모습과 행동은 어렸을 때부터 형성된 것 같았다. 세 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아이는 고모의 손에서 자랐다. 고모는 그 아이를 친자식보다 더 살뜰하게 대했지만 엄마의 품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고모를 소개할 때 엄마라고 소개했다.
얼마 전 어떤 일로 아이 고모가 학교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 고모는 아이의 손을 한시도 때지 않고 잡았다. 때론 눈물을 닦아주고 자신의 옷을 벗어 아이에게 주기도 했다. 머리를 묶어주면 고2나 되는 아이는 순한 양처럼 묵묵히 자신의 머리를 고모에게 맡겼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이에겐 사랑이, 관심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오직 고모의 사랑만 받았을 뿐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지 못한 갈증이 심한 것 같았다.
“은아(가명)야,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네.” “왜 좋아하는지 아니? 거짓말쟁이지, 지각장이지, 공부도 저 밑이지 하는데 말이야.” “…….” “임마. 너에게 희망이 보이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이 널 어떻게 보고 생각하든 처음보다 지금 많이 좋아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널 이뻐하고 좋아하는 거야. 그래서 난 널 전학 보낼 마음이 전혀 없어. 그러니 니가 날 좀 도와줘야 해.” “죄송해요. 근데 선생님한테 뭘 도와줘요?” “학생부 가서 너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줘라. 니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줘. 그래야 나도 할 말이 있을 거 아냐.
아이는 묵묵부답이다. 그러면서도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말에도 아이는 활짝 웃으며 금세 배신을 때린다. 무거운 이야길 나누면서도 웃는 아이를 보니 한편으론 어이없으면서도 따라 웃게 된다.
아이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 왜 두 개의 손이 필요한지. 하나의 손이 혼냄과 질책의 손이라면 다른 한 손은 이해와 감쌈의 손이 되라는 뜻이 아닐까. 한 손이 무서움의 손이라면 다른 한 손은 따뜻한 마음의 손이 되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 역할을 누가 어떻게 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나 각종 언론에서 학교의 필요성을 주로 지식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안다. 해서 ‘학원 강사-유능함, 현직교사-무능함’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거기에 맞춰 판단하려고 하는 것도 안다. 하지만 학교는 아이들에게 부모도 되고 친구도 되고 때론 상담자도 되기도 한다. 지식전달이 주목적이지만 단순이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