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물오름달. 산과 들에 물이 올라 4월의 잎새달을 불러들이는 달이다. 자연은 새순을 틔우느라 바쁘고 학교는 새학기를 시작하느라 바쁘고... 특히 교사들은 새집 단장하랴 새아이들 맞아들이랴 새업무에 익숙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달이다. 화단의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는지, 북향화인 목련의 꽃봉오리가 북쪽을 향해있는지 눈길한번 줄틈 없이 동동거리는 달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야 교사들의 본업이자 사명이니까 억소리나게 바쁘다해도 댓거리할 꺼리가 못된다. 하지만 3월 한 달 내내 환경정리에 목을 매야하는 그런 시간적 투자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시대가 아날로그에서 멀티미디어시대로 바뀌었어도 환경정리만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별반 없다. 오리고 찢고 너덜너덜 붙이고 하다가 시간 다 보내는 그런 3월이라는데는 변함이 없다는 얘기다.
학교의 코팅기는 불티가 나고 교사들의 손에서는 가위와 풀이 떠날 때가 없다. 학교에서 지급되는 아주 기본적인 재료들을 이용해 앞쪽 게시판부터 시작해서 옆벽면을 지나 뒤편 게시판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탓이다. 쉬운일 같아 보이지만 이름표 하나 만들고 코팅하고 오리고 붙이고 하는 일은 거의 한나절을 잡아먹을 정도로 잔손 많이 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름표는 개인 사물함에 붙여진다. 붙여놓을 때야 멋있어보이지만, 몇 년 쓰고 나면 사물함은 양면테이프로 붙였다 뗀 자국으로 시커멓게 변질이 된다. 교사에 취향에 따라 이름표를 크게 만들거나 작게 만들기도 하고, 가운데에 붙이거나 한쪽 귀퉁이에 붙이거나 했던 흔적인 탓이다.
뒤편 작품게시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해에는 주름지 커텐 모양으로 붙였다가, 또 어느 해에는 한지 커텐 모양으로 바꿔서 붙였다 뗀 자국이 선연하여 그 곳은 어떤 형태이든 뭔가를 만들어 붙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지저분하다.
또한 교사들이 즐겨 꾸미는 입체적인 나무모양에 열매를 매다는 환경판을 제작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진땀을 빼서 만든 작품이 정작 아이들에게 얼마나 찬사를 받을지는 의문이다. 솔직히 이런 꾸밈이 어른들을 위한 눈요기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이들은 아무리 어설퍼도 자기작품이 걸려있을 때나 관심을 보이지 선생님이 정성들여 제작한 것에는 별관심이 없다. 아무리 예쁘게 꾸며놓았어도 그때 뿐 그 뒤로는 관심이 없다. 어설프고 조잡해도 자기작품이 붙여있을 때야만 보고 또 보고 신물이 나도록 본다.
하지만 뒤편의 작품 게시판에 아이들 작품만 걸었다간 관리자에게 불호령이 떨어진다. 도대체 환경구성을 어떻게 했느냐고 지청구를 먹는다. 아이들에게 적합한 환경구성 운운하면서 말이다. 아늑해야 하고 아이들 눈높이에 맞아야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말이다.
학교교실이 처음부터 안온하지 않은데 게시판 하나 잘꾸몄다고 아이들에게 적합한 환경이 된단 말인가? 3월에 꾸며놓으면 나무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도 그냥 일년동안 가는 그런 환경구성이 아이들에게 적합하단 말인가? 넓직한 작품 게시판이 치장하는데 거지반 차지하고 정작 아이들의 작품은 반도 게시하지 못하는게 적합하단 말인가?
나무 꾸미고 숲 꾸미고하면 삼사십명 되는 아이들의 작품을 다 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창문이며 복도쪽에 게시하게 되는 주객이 전도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집안에서 바깥을 내다보게 하는 통로이자 환기기능과 채광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창문의 역할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매년 이렇게 아날로그적인 수고를 되풀이할바엔 게시판을 아예 지금처럼 초록융단 일색이 아닌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파스텔톤의 게시판으로 리모델링해서 교사들은 아이들 작품만 수시로 게시할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을 만드느라 3월 한달을 낑낑대는 그런 시간에 교사들은 학습자료를 만드는데 신경을 쓴다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더불어 환경구성하느라 고생한 교사들 위로는 못해줄망정 몇푼 안되는 환경물품 지급해주었다고 교장, 교감, 행정실장이 환경심사위원이 되어 무언가 잔뜩 적으며 교실을 순시하는 그런 전시행정에 맘이 울적해지는 것은 왜일까?
“곧, 교장, 교감, 행정실장의 환경심사가 있겠습니다. 선생님들은 교실에서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방송에 교사의 자존심이 울컥했다면 너무 과민반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