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이다. 방이나 교실, 도서관에 조용히 앉아 독서하기보다는 지천으로 널린 봄꽃들의 손짓에 마음이 가는 계절이다. 지구온난화의 여파로 이렇게 아름다운 봄이 갈수록 짧아져서 제대로 봄을 만끽할 여유도 없이 여름이 다가선다. 어찌 보면 우리 인생의 봄도 그렇게 짧지 않던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어린 시절은 금세 가 버리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야 하는 젊음의 계절, 여름이 금방 오기 때문이다.
인생의 사계절 중에서 봄은 어린 시절에 해당되리라. 평생을 살아갈 토양을 만들고 튼실한 씨앗을 뿌려서 다가올 젊음의 계절을 준비하는 봄. 좋은 습관을 길들이고 바르고 건전한 생각을 키워 가야 하는 시절이다. 바로 그 토양은 부모와 선생님, 사회와 국가의 몫이다.
꽃들은 자신이 꽃을 피워야 할 그 날을 잊지 않고 꽃을 피워낸다. 아무런 말없이 그 숭고한 일을 해내면서 우리를 가르친다. 그렇게 자신의 꽃을 피워내야 한다고 몸으로 보여준다.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차가운 겨울비에도 작디 작은 꽃망울을 매달고 서서 겨울을 이겨낸 옹골찬 기백을 보드라운 꽃잎 속에 숨겨놓고 그 자리에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도,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세상을 향해 웃는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자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꽃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장미꽃이 화려하고 예쁘다고 세상의 꽃들이 다 장미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고. 돌 틈 사이에서 얼굴을 내민 괭이밥 노랑꽃도, 봄까치꽃도 자신만의 색깔로 이 봄을 노래한다. 때로는 한 줌 봄나물로 식탁에 올라 한 입 찬거리로 만족하는 냉이까지도 그것이 자신의 기쁨임을 노래하며 이 봄을 노래한다.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말없이 있는 그대로 열심히 살다 가면 되는 것뿐이다. 교육이란 어찌 보면 자리매김을 배우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각기 얼굴이 다른 아이들, 자란 환경이 다른 아이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아가는 교실에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자기만의 꽃 색깔을 피워내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요즈음의 교육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보다 같아지려고 몸부림하는 모습들이 너무 많아서 안타깝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에 너도나도 뛰어드는 모습, 유행을 좇는 교육 풍토가 그렇다. 누군가 한, 두 가지 이슈를 들고나오면 그 쪽으로 몰려서 온통 법썩을 떠는 풍조가 우리 아이들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까치꽃을 피우도록 유전자가 결정된 아이에게 장미꽃을 피우게 하려고 외부 환경을 바꾸어 주려고 몸살하는 어른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겨우 다섯 명이다. 그런데도 다섯 명이 가진 개성이 서로 판이하게 다르다. 독서하는 일에는 몰입을 못하지만 장단을 치거나 노래를 부르면 정확하게 표현하는 현민이가 있는 가 하면 책을 손에 들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 읽기에 빠져 들어서 즐거워하는 은비, 그 깍듯함이 자로 잰 듯 정확하고 예의 바른 준희, 이야기 하기를 즐기고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잘 표현하여 글 쓰기를 잘 하는 은지, 수리 계산이 빠르고 몸놀림도 좋은 인재에 이르기까지 다섯 아이의 공통점은 거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교실에 꽃을 심어도 꽃들마다 다 달라서 똑같은 양의 물을 주어서는 잘 자라지 않음을 본다. 예쁘다고 날마다 물을 주어서는 금방 힘들다며 이파리를 떨어뜨린다. 그 향기가 좋다며 로즈마리 화분을 이리저리 들고다녔더니 녀석이 귀찮다며 시들시들하다. 어떤 꽃은 날마다 물을 줘야 좋아하고 어떤 화분은 잎에다 물을 주면 금방 힘들어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부모나 선생님이 좋다고 이것저것 다 요구하면 자신만의 향기가 무엇인지, 어디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아직 자신의 뿌리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흔들거리는 나무임을 어른들은 꼭 알아야 한다. 아이들이 어떤 일을 할 때 즐겁고 재미있어 하는지, 그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기회를 제공하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일이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해야 할 몫이다.
봄꽃들은 그걸 가르쳐 준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가 개나리인지 진달래인지, 장미꽃인지 목련꽃인지 살펴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미가 급한 아이, 손놀림은 둔해도 생각이 깊어 영민한 아이가 있는 가 하면 뭐든지 눈에 보이게 써야 기억하는 아이도 있다.
내 눈에는 샛노란 수선화가 제일 예쁘고 청순한데 우리 반 아이들은 목련꽃의 깨끗함을 더 좋아했다. 그 꽃잎이 뻥튀기를 닮았다고 시를 쓰는 준희의 예민한 감수성 앞에서 나도 탄복을 했고, 꽃들이 친구라며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고운 마음을 쓴 아이들의 시를 읽노라면 선생님은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다.
나는 그저 그 장소로, 물가로 아이들을 데려다 주면 되는 것이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할 일은 바로 아이들에게 멍석을 깔아주는 일이다.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자식들의 생각보다는 부모의 생각으로 아이들의 꿈과 미래를 재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봄바람에 목련꽃이 지고 있다며 꽃잎을 들고 애처로워하는 아이들의 슬픈 표정이 예쁘다. 자기 이름이 달린 화분의 꽃을 보며 날마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이 아이들의 사랑스러움을 세상의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그 아이들을 슬프게 하는 일들이 날마다 지면을 장식하는 현실이 슬프다.
지난 밤에 엄마 아빠가 다투었다고 공부 시간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아이는 하루 종일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할머니 밖에 안 계신 일요일엔 심심하다며 혼자 걸어서 읍내에 가서 컴퓨터게임을 하러 간 아이에게는 유괴범 같은 나쁜 어른들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겁을 주며 마음이 아팠다.
학원에 가서 공부하랴, 집에서는 학습지를 하느라 놀 시간이 없다는 아이는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웃는 일도 별로 없다. 이제 겨우 2학년인데 세상은 온통과 경쟁과 뒤지지 않기 위한 전쟁터같다. 놀 시간을 줘도 어울려 놀 줄 모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놀 시간조차 없다는 2학년 아이들에게 '봄'은 언제일까?
우리 인생의 봄은 너무 짧다. 누구에게나 있었던 그 어린 시절이 짧아서 더 아쉬운 봄!
내일이면 4월의 문이 열린다. 3월은 4월을 위해 부지런히 앞마당을 쓸고다녔다. 세상의 꽃이란 꽃은 다 나와서 잔치를 벌이는 4월이다. 이 땅의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화사한 4월이기를 빌어본다. 4월에는 우리 아이들이 좀더 많이 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초등학교는 기초 기본 학습이 중요하고 건강이 중요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저장하는 시기여야 하는데 이 땅의 아이들은 초등학교부터 무거운 가방에 짓눌려 있다.
놀 시간조차 부족한 아이들인데 놀이터에서 공원에서 심지어 자기 아파트 앞까지 유괴범이 흉기를 들고 기다리는 세상이 되었으니 아이들 보기가 부끄럽다. 세상의 어른들은 모두 의심하고 보라고 가르쳐야 할 판이니 참 슬픈 세상이다. 남자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직업, 경찰관 아저씨마저 아이들 편이 아니라니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그래서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다만 자기 몸은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밥도 많이 먹고 튼튼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해 주었을 뿐.
바른생활 시간에 배우는 친절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어른들에게 예의 바른 태도를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인지 정확한 매뉴얼이 필요한 때이다. 이웃집 아저씨도 길을 물어보는 어른들에게도 친절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야 하는 우리 아이들의 '봄'에게 참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