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배를 타고 5시간 정도 달리다 보면 저녁 어스름 속에 한 섬이 보입니다. 탐라 제주도입니다. 2시 30분에 출항하는 배를 탔으니 도착시간은 7시 30분입니다. 함께 간 동료들과 배안에서 복분자 한 잔 했습니다. 파도에 흔들거리는 선실에서 잠 한숨 자고 책을 읽었습니다.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라는 책입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읽을 만한 책으론 바다이야기와 그곳에 살고 있는 생명들을 기록한 글이 제격이라 생각하여 배낭 속에 넣어두었던 것입니다.
한라산 등반. 이게 제주에 간 목적입니다. 작년부터 몇몇 사람이 계획했던 것인데 실행엔 옮겼으나 결국 등반은 하지 못한 채 돌아왔습니다. 함께 간 동료 한 사람이 몸살에 배탈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이 제대로 맞아 떨어진 셈이지요. 대신 편하게 가볼만한 곳으로 몇 군데 들러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제주
제주에 대한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은 딱 두 번 있습니다. 10여 년 전 겨울과 7.8년 전 우연찮게 들렀던 주상절리입니다. 10여 년 전 그해 겨울은 눈이 참 많이 왔던 것 같습니다. 아침, 숙소에서 창문을 열고 바라본 밖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습니다. 길가의 야자수에도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는 모습이 왜 그리 색다르게 보였는지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제주라는 곳이 있다는 건 참으로 크나 큰 행복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 기억 속을 지배했던 것은 아닙니다.
차속에서 본 눈 속의 붉은 꽃입니다. 가로수 겸 울타리용으로 심어져 있어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같은 것이었습니다. 명자꽃 같은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땐 그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잠시 차를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솜털 같은 백설을 가득 담고 붉은 꽃은 생글거리며 깊은 홍조를 띠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처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아마 눈 속을 뚫고 피어오른 복수초 같다고 할까요. 그러나 그 꽃들은 서로 어깨를 의지하며 무리무리 피어 있어 복수초 같은 외로움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주상절리도 내 마음에 깊은 인상으로 자리 잡은 곳입니다. 그땐 지금처럼 관광지로 개발이 안 된 상태였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순수하게 간직했던 때입니다.
포장되지 않은 길, 홍위병처럼 서있는 야자수 사이를 걸어가다 바라보이는 바다와 저 멀리 떠있는 배들이 왜 그리 아름답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절벽을 따라 내려가 해녀가 갓 잡아 올린 해산물로 소주 한 잔을 했습니다. 술잔은 바로 소라 껍질이고요.
내 귀는 소라 껍질
바다 소리를 늘 그리워한다
- 장 콕도, 「귀」-
바다엔 두 개의 소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파도의 소리이고 또 하나는 소라고둥이 내는 소리입니다. 파도 소리는 변덕이 심합니다. 기분에 따라 소리를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라는 늘 같은 소리를 냅니다. 악보도 없이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고 엄마처럼 자장가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때론 시인처럼 그윽한 시를 읊어주기도 합니다. 소리만 들려주는 게 아닙니다. 바다가 품은 것들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맛도 보여줍니다. 바다가 그립거나 외로운 사람은 소라껍질을 귀에 대보세요. 바다가 보이고 외로운 가슴을 달래주는 노래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바다 내음을 기분 좋은 웃음으로 마시고 해녀의 삶을 바다에 실려 보내면서 조금 걸어 올라오면 주상절리의 그 아름다움이 눈을 사로잡습니다. 검은 기둥을 시샘하듯 솟구쳐 오르는 파도와 부서져 흩어지는 포말은 주상절리의 백미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듯 근래엔 그 거세면서도 아름다운 파도를 본 적이 없습니다. 관광하기 좋게 길을 만들어 놓은 후론 파도의 몸짓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다가 인간의 마음을 안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도 잔잔한 바다만이 나그네를 맞이할 뿐 바다는 파도의 몸짓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주에 갈 기회가 있으면 꼭 들르는 곳이 주상절리입니다. 예전에 보았던 그 파도와 물보라의 몸짓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아니 소라 껍질에 대한 추억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게 좋다
누가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독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새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게 좋다
- 정호승 「바닷가에 대하여」-
우리는 마음속에 그리운 섬 하나씩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섬에 자기만의 바닷가를 만들고 싶고 삶이 외롭거나 고달프다 생각할 때 그 바닷가에 달려가 위안을 받고 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바다가 언제나 기다려주는 건 아닌가봅니다. 바다는 그대로이고 싶은데 사람들이 그냥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현실 속에 또는 마음속에 섬 하나와 바다 하나쯤 지니고 사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바다에 가면 바다의 숨소릴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라고둥에서 들려오는 바다의 소식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