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비굴한 음악가가 있다. 죽음을 실어 나르는 수용소 기차에 올라타기 직전에 운 좋게 빠져 나온 그는 가족들이 모두 죽음에 이를 것을 알면서도 어줍잖은 몇 마디를 비겁하게 내뱉고는 유유히 삶의 연장선에 올라탄다. 전쟁 발발의 긴박감과 짓누르는 듯한 공포도 잠시, 영화는 이
때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주인공 스필만의 도피 행각과 함께 한다.
20세기 최악의 재앙이라는 유태인 학살과 나치의 만행이 영화 곳곳에 끊임없이 배치되어 있음에도, '피아니스트'는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이입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한 광경이 죽음을 맞이하는 자의 호흡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 발치 먼 곳에 숨죽이고 있는 주인공의 눈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누가 그랬던가.
전쟁과 학살의 진정한 공포는 죽은 자들의 몫이라고. 살아남은 자들의 입을 통한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날로 쓸 수 없다는 뜻이리라.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그래서, 과거의 응어리를 자신의 목청으로 돋우어 내는 대신 한 피아니스트의 생존기를 통해 감정의 큰 몰아침 없이 담담하게 녹여내기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피아니스트 스필만은 생존보다 가족애를 택한 동생들과는 달리 가족을 버리고 살아남기를 선택한다. 저항군에 가담은커녕 그들의 죽음 앞에 남은 것이 무엇이냐며 회의한다. 생존에의 욕망보다 절실한 것은 없다며, 목숨도 내어놓는 도덕적 가치와 이념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스필만이라는 인간은, 그렇기에, 독일군 코트를 입고있던 모습 그대로 비굴하고 초라하게 평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빵만으로 살순 없다고 외치지만 빵이 사라진 후에 가장 먼저 찾는 것은 꿈도 자유도 아닌 빵이다. 모든 것은 빵의 존재, 그 이후의 이야기 혹은 논쟁이기 때문이다. 피아노만은 치게 해달라고 울부짖는 주인공의 절규가 존재하지 않아도 처절함과 절실함이 충분히 전해지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결국 스필만은 승리했다. 쇼팽의 곡을 빌어 살아있음을 연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도 결국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까. 오직 살아남았음에 대한 찬가인 이 영화는, 영화를 보는 관객까지 '보고 있는 삶의 행위'라는 '살아있음'으로 스필만의 승리에 동참시킨다. 비굴하지만 아름다운 이 유태인의 승리에 대해 아직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묻고 싶은가. 어차피 인간이란 그리 대단할 것도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