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의 첫날. 바쁘게 생활하다 갑자기 주어진 무한의 휴식이 사람을 멍하게 만듭니다. 평소의 습관대로 아침 여섯시에 일어났더니 정말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소탐산 등정에 나섰습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알맞은 기온에 새벽안개까지 자욱하니 마치 선경을 거니는 듯했습니다. 지상으로 낮게 내려앉은 안개를 타고 금방이라도 아리따운 선녀가 하강할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였습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들깨밭을 지났습니다. 살랑이는 바람결에 실려 온 고소한 깻잎냄새가 코를 자극합니다. 가슴을 활짝 열고 자연이 주는 맛있는 냄새를 실컷 마셨습니다.
조금 지나니 논에선 벼들이 벌써 누런 황금색을 띠어가며 고개를 숙여가고 있더군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한 컷 찍었습니다. 생이불유(生而不有)라. 노자의 도덕경에나오는 구절로 비록 내 것이 아니더라도 풍요로운 자연을 보면 마음이 더없이 행복해진다는 뜻입니다.
여섯시 20분. 본격적인 햇살이 비치려면 좀더 시간이 흘러야 합니다. 울밑에 핀 자주색 나팔꽃에는 이름 모를 들꽃과 함께 영롱한 아침이슬이 아직도 생생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여름에 정열적으로 피어나던 봉숭아도, 때를 잊고 피어나던 코스모스도 아직은 그대로입니다. 붉은 연지 같은 색감이 보는 이의 가슴을 황홀하게 합니다. 어렸을 적 백반과 함께 으깨어 손톱에 물을 들이던 아름다운 누이가 생각납니다. 저는 그때 봉숭아물을 들인 손톱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톱이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봉숭아가 만발한 울밑을 지나면 소복처럼 하얀 꽃과 함께 머리통 만한 박이 주렁주렁 열린 넓은 공터가 나타납니다. 요즘에 보기 힘든 광경이라 또 기념사진 한 장을 찰칵!
몇 해 전 등산로 주변에 새로 지어진 집이랍니다. 평소에도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침햇살에 빛나는 집을 보니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집처럼 환상적인 분위기가 풍기더군요. 아, 저도 저런 집에서 살고 싶네요. 더군다나 집 앞에는 먹음직스런 석류가 익어가고 울타리에는 붉은 강낭콩꽃이 만발해있었습니다.
자 이제 저 멀리로 소탐산이 보이네요. 토종닭을 키우는 농장을 지나면 바로 소탐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이 나타납니다. 정말 아름다운 길입니다. 들리는 것은 새벽의 고요와 그리고 안개가 아카시아 잎에 내려앉는 사뿐한 소리뿐. 적막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초입입니다. 가끔 운동화에 밟히는 잔디의 촉감이 푹신한 레드카펫을 밟는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합니다.
드디어 울창한 산림 속으로 들어섰네요. 상쾌한 피톤치드의 향연과 지저귀는 새소리로 등산로는 금방 분주해집니다. 소나무가지 사이로 비치는 태양이 점차 날이 밝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가사장삼에 주장자 하나만 들면 영락없이 고승이 될 법도 합니다. 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저 길이 문득 우리네 인생길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햇볕을 동무 삼아 저는 계속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다 아주 앙증맞고 귀여운 아기 배를 만났습니다. 쌍방울 모양의 아기배가 어찌나 귀여운지 기념촬영을 해줬답니다. 살짝 한 개를 따서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보니 굉장히 떫더군요. 그냥 보기만 할 걸... 아마 제가 자연을 해친 벌을 톡톡히 받은 모양입니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습니다. 힘들게 오른 탓인지 오늘따라 안개에 싸인 시내가 더욱 환상적으로 보입니다. 아, 모든 것을 용서하는 신비의 아름다움! 그래서 2008년의 한가위는 더욱더 행복할 것 같습니다.
아래의 꽃들은 하산길에 만난 예쁜 저의 친구들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