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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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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설날은 와도, 돌아오지 않는…

당신이 잃어 가는 것, 우리를 기억하게 하는 것


# 프롤로그
까치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고 했다. 인적 드문 산골 마을의 몇 안 되는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까치가 낯선 사람이 오면 울었던 탓에 생겨난 민담인 지도 모른다. 속뜻까지 이렇게 따지고 들지 않아도 까치는 분명 우리에게 반가운 존재다. 제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는 새로, 칠월칠석이면 1년만의 만남을 위해 다리를 놓아준다는 새로 말이다. 때로는 한 해 농사를 망치는 야속한 녀석이었음에도, 옛 사람들은 나뭇가지 꼭대기에 까치밥을 남겨두었다. 가난하고 궁핍한 생활이었음에도 새들의 겨우살이까지 배려할 수 있었던 넉넉하고 멋스러운 마음. 명절은 돌아와도,
이제는 영영 돌아올 것 같지 않아, 잊혀져 가는 것들은 더욱 아쉽다.

#합근박… 신랑신부 첫 술잔, 사랑과 해로 상징
혼례의 하이라이트로 신랑신부가 일심동체가 되는 순간, 신랑신부는 번갈아 한잔 술을 받는다. 이 의식의 제기(祭器)가 바로 합근박. 시집갈 딸이 있는 어머니는 담 아래 정갈스러운 땅을 골라 표주박을 심어 넝쿨을 올린다. 거름도 정갈스럽게 하여 기른 표주박으로 바가지를 만드는데, 만들 때는 반드시 아들 많이 낳고 화목하게 사는 복 있는 마님을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혼례에 쓰고 나면, 합근박은 사랑과 해로의 상징으로 청실 홍실 수실을 달아 신랑신부의 신방 천장에 매달려 사랑의 감시자 역할을 한다. 행여 깨질 뻔한 사랑의 금을 이 감시자는 얼마만큼 아물게 했을까…. 그렇게 세월이 흘러 부부가 회혼(回婚 결혼 60주년)을 맞으면 합근박에 다시 술을 담아 나눠 마셨다고 한다. 60년을 해로한 부부가 서로 술 한 잔 나누며 느낀 것은 무엇일까. 인생무상(人生無常)?

#인절미… 끊어 잘라먹으며 동심(同心)으로
요즘도 연변 조선족 집에서는 밥상 복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떡 한 무럭을 차려낸다고 한다. 손님들은 밥숟가락을 들기 전에 그 흰떡 한쪽을 끌어당겨 잘라먹는다. '끊어서 잘라먹는다'해서 인절미. 사람은 사이(間) 때문에 인간이며, 벌어지기 쉬운 그 사이를 유지시키는 방편으로 발달한 것이 바로 동질의 것을 공식(共食)하는 '한솥밥' 습속이다. 인절미 역시 그 문화의 하나. 정월 대보름이 닥치면 지난해 크고 작은 원한(怨恨)을 산 사람을 헤아려 그 수만큼 인절미를 만들어놓는다.

보름날 산사에서 스님이 내려와 법고를 치며 적선을 권하고 다니면 스님 편에 원한 산 사람에게 이 떡을 배달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원한을 푼다고 해서 '원풀이 떡'이라고도 했다. 시집간 딸의 첫 친정나들이에 반드시 인절미를 시집에 선물하는 것도 소외당하기 쉬운 며느리를 시집에 영원히 동질화시키려는 의식이었다. 이심(異心)을 동심(同心)으로 전환시켰던 아름다운 인절미의 정신은 끊어 잘라 버리고 지금은, 떡만 남았다.

#아랫목… 아랫목에 발 묻고 즐기던 후끈한 단란
부엌이 사라지면서 아궁이를 통한 평면 난방이 입체 난방으로 바뀌었다. 평면 난방의 증발은 곧 온돌의 상실을 의미한다. 유럽 알프스나 북구 캐나다 등지에서는 혈액망과 신경망의 교차 교류를 활성화시켜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체외열 도입 기능 때문에 요즘 온돌 하나씩을 들이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우리는 잃어가고, 그들은 찾아내고…. 자꾸만 이간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결속시켜주는 아랫목. 눈바람 몰아치는 밤에 덜렁한 침대에 홀로 누워 있기보다 따끈한 아랫목에 서로 발을 묻고 오순도순 단란을 즐기고 싶다. 해외 교포의 향수 가운데 가장 빈도가 높은 것이 아랫목이라는 조사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누비질… 한 뜸 한 뜸 되풀이에 스트레스 무산(霧散)
박지원의 '함양박씨 열녀전'을 보면 과부로서 참기 어려운 고비나 일을 당하면 장롱 깊숙이 숨겨둔 엽전 한 닢을 꺼내 손아귀에서 굴림으로써 참는 대목이 나온다. 어찌나 굴렸던지 엽전에 새겨진 글씨가 다 닳아 민둥 돈이 돼 있었다 했다. 옛 부녀자들의 '인내 민속'으로는 누비질도 있다. 괴로운 일이 있으면 누비질감을 꺼내어 마냥 누벼대고, 한 뜸 한 뜸 되풀이해 가는 사이에 스트레스는 구름처럼 무산되어 간다.

그래서 굴리는 엽전을 '인고전', 뜨는 누비질을 '인고봉'이라 했다. 이렇게 평생 뜬 누비 옷감으로 속바지를 해 입는 풍속이 있었으니 누비바지야말로 한국 여성의 슬픈 자화상 아닐까.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이 스트레스 해산을 가속화시킨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바 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어떤 수단을 찾고있다면, 누비질의 민속을 되살려 보자. 그 옛날, 여인의 한도 닳게 했는데, 까짓 스트레스쯤이야….

#조허모… 온 집안 밝히고 새해를 기다리니
옛날 집 부엌에는 복판 벽을 U자형으로 파고 거기에 정화수를 떠놓았다. 부엌신인 조왕을 모시는 제단이 그것. 조왕은 섣달 스무나흗 날 굴뚝을 통해 하늘에 올라갔다가 섣달 그믐날 굴뚝을 통해 돌아온다고 한다. 그 동안 조왕은 하늘에 계시는 옥황상제를 뵙고 한 해 동안 그 집에서 지켜본 가족들의 행실을 낱낱이 치부해두었다가 상제에게 고한다. 상제가 이를 듣고 선악을 가려 새해에 받을 화복을 배정해주면 조왕은 이를 받아 들고 돌아온다.

새해의 운명이 결정되는 연말은 지난 한 해 동안 저지른 자신의 과오와 잘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침으로써 상제의 노여움을 녹일 수 있는 시기로 알았다. 그래서 조왕이 상천해 있는 동안 사람들은 겸허하게 몸을 사렸기로, 정초를 '사린다'는 뜻인 설이라 일컫게 됐다는 설도 있다. 조왕이 돌아오는 그믐날 밤 부엌을 비롯 곳간, 장독대, 외양간, 칙간 등 온 집안에 불을 켜 대낮같이 밝혀놓고 잠자지 않고 새해의 운명을 겸허하게 기다렸으니 이를 '조허모'라 한다. 반성하고 뉘우치며, 겸허하게 설을 맞자.

# 에필로그
새것이 폭주하니, 창고에서 꺼내 처분해야 할 것도 그만큼 많을 테지만, 그러나, 혹시 소중한 것들을 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당신이 잃어 가는 것들 속에는 '우리를 기억하게 하는' 소중한 것들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과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동일성을 확인시키는 추억들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사라져 가는 것들의 편린(片鱗)을 찾아 우리의 모습을 완성시키는 작업을 이제 해야 할 시간입니다. 흐트러졌던 새해 다짐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설'이니까요. 지금, 시작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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