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으로부터 필리핀 합창공연을 보러가자는 연락이 왔다. 필리핀 합창단? 합창하면 선명회 합창단, 비인소년합창단, 파리나무 십자가 합창단, 베르디의 ‘노예들의 합창’으로 유명한 피셔합창단과 군대와 합창단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새롭던 러시아의 붉은 군대 합창단, 그리고 국내의 몇몇 합창단을 알고 있는 수준의 필자는 필리핀 합창에 관한 지식이 없었으므로 저녁나절 걸어서 가는 거리에 있는 대전문화예술의 전당에 ‘걸어서 왔다갔다 운동이나 하자’하는 시큰둥한 마음으로 털레털레 공연장에 들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론 팜플렛을 살 생각도 안했다. 그러다가 생각해보니 공연표를 준 지인에게 고맙다는 표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팜플렛을 사서 건네주고 별 기대없이 기다렸다.
무대에 반원형태로 의자들이 놓여있고, 드디어 필리핀 전통의상을 입은 합창단원들이 나왔다. 차례차례 각자의 의자에 단원들이 다 앉은 다음 단장이 나오고 관객에게 인사를 한 다음 의자에 앉았다. 단원 중 몇 사람은 대나무 통과 채를 발밑에 두었다.
흰 웃옷에 검은 치마 혹은 흰 치마를 입고 지휘자가 단원의 가운데 서며, 합창단원 전체가 서서 노래하는 풍경에 익숙한 필자에게 약간의 호기심이 생겼다. 단원들의 주황과 밤색계열의 의상과 둥근 앉음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단장과 단원들이 서로 마주보며 입을 맞추더니 드디어 노래가 시작되었다. 성가가 몇 곡 이어졌고, 일상의 곡들이 불리어졌다. 화성이 대단했다. 그러나 필자에게 인상깊었던 것은 환상적인 화음이 아니었다. 성가편이 끝나고 일상의 곡들이 이어질 때 갑자기 단원 중의 한 명이 개짖는 소리를 내었다. 이어서 다른 단원들이 ‘꼬끼오~’하는 새벽 닭소리 그리고 필자가 생각하기에 바람에 대나무 숲 움직이는 소리, 새소리, 시냇물 소리 등등을 여기저기서 불규칙하게 들려주되 잘 화합되어 필자는 필리핀 산골의 이른 아침 풍경을 생각했다.
코코아 나뭇잎과 대나무로 지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을 뒤 우거진 숲으로 둘러싸인 큰 산이 허리께에 안개를 두르고, 햇빛에 장엄하게 빛나는 솟은 봉우리가 마을을 감싸는 풍경이 그려졌다. 톡톡톡 비가 내리고, 점점 바람이 거세어지더니 ‘휘이∼잉’ 큰 비바람이 일고, 뒤이은 합창 소리에서는 안개 자욱한 산허리, 그리고 더 올라가 밝게 빛나는 정상의 봉우리를 그릴 수 있었다.
필자는 지인에게서 팜플렛을 달라고 하여 읽어보기 시작하였다. ‘세계 최정상의 하모니’, ‘영혼과 가슴으로 노래하는’ ‘형식과 틀을 깨버린’ ‘자연의 소리로 현대 음악의 논리를 무색케 한’ ‘합창으로 세계를 정복한’ 등등의 굵은 수식어가 보였다.
1963년에 국립 필리핀 대학 성악과 안드레아 베네라시온 교수에 의해 창립 발전된 합창단으로 필리핀의 풍부한 음악적 유산을 스스로에게 일깨우고 또한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고 현재는 세계 곳곳에서 인정받는 합창단이다.
팜플렛과 무대를 보며 생각에 잠길 즈음, 갑자기 ‘재깔재깔’ 웃고 떠드는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합창단원들이 입으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전 단원이 한번은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한 번은 왼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입으로 아이들이 노는 풍경을 연출하더니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 한국 전래동요를 멋진 화음으로 불러주었다. 뒤이어 ‘자장자장 우리 아기, 자장자장 잘도 잔다. 꼬꼬닭아 우지마라, 멍멍개야 짖지마라’를 부르는데 필자가 감동받은 것은 한국어로 노랫말을 부를 뿐 아니라 한국의 밤풍경을 그려내는데 있었다. 집 밖의 풀벌레 소리들을 노래를 받혀주는 화음으로 사용하고 아기가 잠들 즈음, ‘부으엉’ 하고 부엉이 소리를 내어 가을 밤 풍경을 그려내었다. 나뭇가지 위에 걸린 둥그런 보름달이 스크린에 비추면 아주 제격이었겠다.
제 2부에 들어서는 필리핀 음악과 팝송을 들려주었는데 정적인 분위기를 바꾸고자 합창단원들이 일어서서 약간의 코믹한 연기도 하고, 북소리에 맞추어 방울을 흔들며 춤을 추기도 하였다.
깊은 감동은 필자만은 아니었던지 앵콜을 많이 요청한 탓으로 필자의 동행인은 합창단원들이 피곤하고 힘들까봐 걱정을 해주었다. 한국팬에 대한 서비스로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몽금포 타령을 들려주고 단원들이 무대 뒤로 돌아갈 때 대전 예술의 전당 관계자는 불을 켜서 관객들에게 마지막 곡임을 알리고 퇴장해야 함을 점쟎게 알려주었다. 공연에 관하여 필자가 덧붙일 말은 없으나 음악을 좋아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 ‘이러면 더 좋을 것 같다’하고 바램을 가질 수는 있겠다.
필자는 목소리와 목소리로 연출하는 하모니를 돋보이게 하는 약간의 악기 즉 대나무통이나 방울을 사용하여 한 폭의 동양화처럼 ‘자장가’ 그 노래 자체뿐 아니라 늦가을의 밤을 알려주는 풀벌레 소리와 부엉이 소리로 둥그런 초가지붕과 등황빛의 커다란 보름달 그리고 달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는 둥근 박 등 배경 전체를 연상케 하는 그 합창에 찬사 이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제 2부에서 합창단원들이 다양하게 움직이며 역동성을 보였으나 같은 음색, 같은 단원들, 같은 의상이었으므로 약간의 지루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제 2부는 노래와 노래외 장르와의 결합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제1부의 내용을 반복하되 성가는 스크린을 통해 성화(聖畵)를 보여줄 수도 있고, 필리핀 노래의 경우 영상과 해설을 통해 관객의 이해를 도울 수도 있을 것 같다. 한국의 전래동요의 경우 클래식한 마드리갈 싱어즈의 노래 음색을 재즈풍의 한국 음악인이 다른 분위기로 불러보게 할 수 있으며, 그림자 인형극을 통한 전경 연출도 있을 수 있겠다.
2009년 4월 27일 월요일 오후 7시 30분 대전 예술의 전당에서 필자는 합창의 새 세계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