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약소국의 재물로, 당파와 역모사건에 휩싸여, 부왕의 독선이나 야망 때문에, 일반백성보다 못한 처절하고 애달픈 숙명 속에 사라져간 ‘왕이 못된 세자들’- 이들이 분명 한때는 별빛보다 찬란했던 1국의 2인자들이었다.
불행했던 세자들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한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가 내겐 너무나 강렬했다. 우리 모두 퇴직이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여정이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한 직장의 2인자이거나 그 방향에 놓여 있고, 또 가족구성 서열로 볼 때 2인자이거나 그 부모이며 1인자의 자녀 또는 형제이기 때문에.
이 책은 ‘영조실록’ ‘한중록’ 같은 수많은 사료와 단행본 ‘세월이여 왕조여’ 같은 수 십 권의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조선의 세자 27명 중 왕이 되지 못한 12명의 2인자들에 관한 역사이야기이다. 애절하고 때로는 비통했던 생애를 들여다보면 왕조시대 세자의 운명이란 결코 화려하거나 행복하지 않았다. 창의적 능력의 발휘나 능동적 이상실현과는 먼 막중한 의무와 복종, 수동적 대리청정이나 모범적 예절 강요의 틈바구니에서 역사의 풍파를 헤쳐가지 못하고 희생된 꽃봉오리였다.
뒤주안에 죽는구나 불쌍한 사도세자/ 꽃피는 청춘도…’ 가요로 친근해진 이름 사도세자, 그에 대해 궁금해서 먼저 읽었다. 조선의 세자들 중 크나큰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태어났지만 그처럼 참혹하고 의혹스런 죽음을 피하지 못한 사연은 어떤지 요술주머니처럼 이야기를 술술 풀어가고 있다. 첫돌 지나자 세자에 책봉되어 유교적 공부에 정진해야 하는 고달픔은 천재의 숙명이라 치고, 처음으로 아버지 영조가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하여 엄청난 괴로움을 안긴 것이 다섯 살 때라니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영단이라 해도 너무나 정치적이며 비인간적 교활함인 것이다. 신동이라고 촉망받던 세자는 4색당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왕 분부 잘 받드는 모범생이 되었다가, 자신의 뜻대로 무엇 하나도 할 수 없는 꼭두각시 문제아로 변한다.
한창 나이에 세자궁에 갇혀 억지로 학문을 익히며 아침저녁 부왕과 모후, 웃어른께 문안하는 것을 비롯해 각종 행사주관과 참석은 요즘 말로 하면 취미, 재능, 장래희망과도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은 당파에 따라 각색이 되고 변질되어 비행으로 낙인찍혀 마침내 쿠데타의 수괴가 된다. 영조는 세자를 정적이자 자신의 왕위를 노리는 역적으로 보았고, 세자는 절망에 빠져 더욱 절대적 고립에 놓이게 되는데, 저자 함규진은 그가 뒤주 속이 아닌 강서원 골방에서 죽었다는 추정을 하면서 사도세자를 숨 막히게 한 것은 ‘뒤주도 골방도 아닌 조선이 만든 위선적이고 경직된 세자제도’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효율적이고 시기와 질투와 모함을 낳게 하는 세자제도는 비민주적 비효율적이고 비교육적, 불공정한 결점투성이 제도였고, 후손이 없었던 많은 경우를 보면 결코 우생학적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수백 년 동안 지탱해 왔는지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든다.
갖은 고생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 인조의 의심과 경계심 속에 두 달 만에 죽은 소현세자. 아버지의 벼루에 맞아 사망했는지 독살의 소문은 진실이 아닌지 몰라도 세자의 사후 아내와 아들 셋까지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역사의 흔적은 씻을 수 없는 아픔이다. 지금도 타향살이라면 1년도 지겨운데 타국에 8년간 볼모살이 한 소현세자 이왕은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세자이다.
의안대군 이방석은 조선 최초의 세자이자 살해된 첫 세자요, 역사의 희생자이다. 이복형제들에 의해 죽고 난 후에도 왕자의 난에 관련된 역적에 포함시킬 것인지 아닌지 모호한 처지에 놓였다는데 태종 이방원은 형제들의 죽음과 자신은 무관했다고 변명했던 것이다.
태종의 실제적 맏아들이며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양녕, 그가 왕좌에 연연하지 않고 ‘세종의 위대함을 미리 꿰뚫어 보고 나라와 백성의 행복을 위해 일부러 미친 짓을 해가며 자신보다 나은 동생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준 그 깊은 뜻’에 관한 한, 실록을 꼼꼼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진실을 알 수 있다는 것. 역사적 인물 중 당시의 참모습을 벗어나 실제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진 ‘전설적 인물’ 중 하나가 양녕대군 이제.
이 밖에도 세조의 맏아들로 세자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병마에 희생된 의경세자 이장,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맏아들로 20세에 병사한 순회세자 이부, 영조와 정빈 이씨의 맏아들로 태어나 2년간 세자 노릇하고 사후에 황제 칭호를 받은 효장세자 이행,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난 문효세자 이향, 순조의 맏아들로 성군의 자질이 남달랐다던 효명세자 이영, 조선의 왕으로는 파격적이었고 세자 교육에도 남달랐던 아버지가 폐위되는 바람에 함께 “새 둥지가 무너지는 통에 아울러 깨지는 새알”처럼 사라져 간 연산군의 폐세자 이황, 광해군의 이질…
비록 왕의 칭호는 얻었지만 우리 모두 조선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영친왕,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정략 결혼한 조선의 세자이면서 일본 황실의 일원이었던 정체성이 모호한 인물. 일본군 육군장성의 신분과 조선왕조 전통의 후예로서의 책임감과 자부심 사이에서 끝내 실어증을 앓아 조선말도 일본말도 못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진, 민족의 한과 서러움을 각인시켜준 마지막 세자 영친왕, 노년의 삶은 어느 죽음보다 비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