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에는 꽃이 필요해. 차고 흰 벽 앞에서 눈을 뜰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꽃을 사러 나가지는 않는다. 방의 삭막함만큼 나의 몸도 굴뚝 속처럼 메마르다. 손을 뻗어 물 잔을 더듬는다. 일어나. 아침이야. '델러웨이 부인'(영화 '디 아워스'의 연결고리를 이루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보다 잠든 지난 밤. 책장에서 얼굴을 들었는데도 마음은 현실로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 아침
1923년의 버지니아와 1951년의 로라와 현재의 클라리사. 그들은 모두 문을 등지고 누워 있다. 별안간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도 덜 당혹스러울 그런, 자세로. 그러나 그녀들에게는 오늘 호스티스가 되어 주최할 파티가 있다. 케이크를 굽고 꽃을 꽂지 않으면 그녀의 사랑을 반문할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잘 되어가는 척하던 그녀들의 안간힘은 터져 갈라진다. 긴 인생의 단 하루. 그리고 단 하루에 쓸어 담겨진 평생의 이야기 '디 아워스'. 하나로 연결된 듯한 세 여자의 궤적은 어디에서 만날 것인가. 또 나는 어디쯤에서 그들과 마주칠 것인가.
# 점심
버지니아는 쓰고, 로라는 읽고, 클래리사는 책을 만든다. 버지니아가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을 쓰면 로라는 그것을 소중히 읽어 내리고 클래리사는 소리내어 말한다. "꽃은 내가 사야겠어"라고. 더없이 쾌청하고 평온한 오후, 그녀들은 게를 요리하고,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며, 죽느냐 사느냐를 자문한다. 그녀들은 그렇게 순간순간 청춘을 기억하고 죽음을 상기하며 나아간다.
# 저녁
하루가 저물 무렵 댈러웨이 부인과 로라는 살기로 한다. 버지니아와 리처드는 죽기로 한다. 죽은 자들은 패배하여 도주한 것일까. 버지니아는 "삶에서 도망침으로써 평안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를 채워 넣고 호수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니까 자살은 삶의 회피일
수 없다. 정말 사랑한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삶을 사랑한다면 그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치열하게 살거나 아니면 죽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 생각한다. 나는 잘 살아가고 있는가. "명확한 이유도 없이 인생을 열심히 사랑하고, 추구하고, 자기 멋대로 꾸미고, 자기 둘레에 쌓아올리고는 허물어뜨리고, 한순간도 쉴새없이 다시 새로이 창조"(댈러웨이 부인 중에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버지니아처럼 인생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 다음에 내던져버릴, 로라처럼 아이와 남편을 재우고 어느 새벽 버스정류장으로 나설, 용기가 있는가. 클래리사처럼 "서로를 위해 살아남으려고 하는 건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생(生)을 사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