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훈의 ‘소설보다 흥미로운’ 문학적 산문집근래에 남성 작가의 산문집으로는 처음 읽게 된 『한창훈의 향연』이 책에 실린 글들은 조각조각 떨어진 단문이지만 통째로 읽어도 괜찮을 완결성 갖춘 한편의 산문이다. 특히 몇 편의 글은 탁월한 창작물이라 산문으로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마치 장편소설 한 권 읽는 것 같은 무게감 있는 이야기책이라 해도 되겠다. 1부 ‘닻 놓았던 자리’에는 거문도와 여수 등 작가의 고향이자 삶의 고향인 바다와 섬을 배경으로 소설에서는 차마 말 못했던 이야기들을, 2부 ‘애염명왕의 초대장’에는 섬을 떠나 내륙에서 작가의 길을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경험했던 이문구, 송기원, 유용주 등 문인들과의 만남과 그 인간 군상들에 대한 일화들, 3부 ‘돌아보지 마라, 앞에 있다’에는 바다와 섬의 작가 한창훈의 작품 세계의 원형질이라고 할 근원적 삶의 이야기나 체험들을 거침없고 걸쭉한 입담과 내성적인 언어로 담아 모두 3부로 엮어 차려 놓았다.
실천과 경험으로 낳은 언어, 해풍과 파도로 빚은 산문글쓰기 시작한 지 근 20년 만에 처음 내놓는 소설가 한창훈(『홍합』으로 제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의 첫 산문집. 섬과 항구, 그리고 내륙에서 글쓰기와 노동을 함께 해온 그의 글은 서재나 작업실 안에서만 씌어진 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책을 읽다보면 상대적으로 덜 자주 변하는 변방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마치 변함없는 바다처럼 생생해 도시에서만 나고 자란 사람도 공감할 것이라는 출판사 서평에 동의하게 된다. 정말 누구에게나 잠복되어 있는 ‘바다형 유전자’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인가? 한창훈의 산문은 남성적인 감흥과 남도지방 특유의 글맛을 느끼게 해주므로 ‘천연기념물 격으로 귀한 작품’이란 추천인의 과장된 표현에 솔깃해진다. 얼마 전 인기 여성작가의 산문읽기와는 또 다른 나의 독서경험이었다.
섬 출신 작가의 삶과 고향 이야기 실제로 태어나 자랐고, 떠나서 그리워하다가 결국 다시 돌아오고 마는 고향 섬에서 그의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 섬을 떠나 항구를 떠돌며 숱한 인생들을 만나고 헤어지거나 영영 못 만난 사연, 생계형 작가가 되고 나서 사귄 문단의 어떤 부류들과 뒹굴었던 서늘한 사연들이 겉으로 드러난 이 산문집의 이야기들이다. 나의 애창곡 ‘그 겨울의 찻집’(조용필 노래) 가사처럼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이야기들을 마음의 혀로 씹다보면 세상살이 외롭고 힘들지만 그런 감정을 뛰어넘는 해일 같은 삶의 파도가 있다. 이모와 함께 지냈던 추억이나 작가의 어린 딸과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지혜와 삶의 태도와 생존 본능적인 반응들을 헤아려보면 삶이 그리 고달프기만 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게 된다.
관찰력이 돋보이는 생소하거나 예리하고 재미있는 문장들‘둘째딸 산수 백점기념 수박 오십 프로 세일…’, 함께 하던 면병수행(面甁修行), 사내 셋과 키스가 가능할 입술…, 원거리 흠모형, 근거리 살림형… 어떤 시인의 팬 분류, 여성스런 남자를 ‘달린 여자’로 빗댄 말, 평생 술과 오입질한 사내의 지옥 풍경에서 “저 술병과 여자에게는 **이 없습니다.”라는 구절, 땟국이 코팅을 한 얼굴의 거지라기엔 직업의식 희박한 친구 황OO가 사모하고 점찍은 여성이 바로 자신의 여동생이라 잠이 확 깼다던 이야기, 여섯 살짜리와의 끝말잇기에서 군인을 ‘구닌’이라고 주장하는 딸의 설득 장면 등이 너무 재미있다. 나 자신이 경상도에서만 살다보니 처음 듣는 유리미(해수욕장 이름), 직박구리, 동박새, 해장죽숲, 쨋밤, 귀보시탕, 항각구국…, 바닷가에나 가야 들어봄직한 ‘가마우지, 물질, 갯것, 작것, 기 개리고, 좆피리, 갈래끼, 똥깡구, 노좆, 팔저리, 헝설이, 빠치망’ 같은 단어들은 바다사나이 한창훈 작가가 막 잡아 올린 활어처럼 싱싱함을 느끼게 한다.
작가 한창훈 특유의 그리움과 희망의 성찬
그의 문장 군데군데 절묘하거나 신통한 부분을 볼 때마다 난 열심히 줄을 긋거나 동그라미 표시를 해가며 읽었다. 작가의 말에서처럼 『한창훈의 향연』이 책은 사람들과, 매순간 명멸하던 감상의 향연이며 성찬이다. 산문집 곳곳에서 등장하는 작가가 인연 맺은 사람들과 항구와 섬과 바닷물고기들과 숲과 바람과 몸과 마음과 영혼의 살을 섞으며 교감했던 시간과 추억들을 실감나게, 혹은 조심스레 고스란히 한 상 가득 차린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아름다운 향연. 그래서 독자들은 작가로부터 수평선을 향하여 또다시 새로운 비행을 꿈꾸는 희망의 전언을 듣는다.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라는.
한창훈 지음, 한창훈의 향연, 중앙북스(주)www.joongangbooks.co.kr 초판인쇄 2009. 9.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