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다사다난했던 2009년도 어느덧 10여 일을 남겨놓고 있다. 그동안 숨가쁘게 달려왔던 한 해를 정리하다보니 문득 자녀를 고등학교에 입학시킬 학부모님들이 생각난다.
지금쯤이면 평준화지역이든 비평준화지역이든 사랑하는 자녀들이 거의 다 입학시험을 치렀을 것이다. 따라서 합격의 영광을 누리는 학생도 있을 것이고 안타깝게도 실패를 경험하고 낙심해 있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합격한 학생들에게는 축하를, 낙방한 학생들에게는 심심한 위로의 인사를 보낸다.
리포터는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예비 신입생 학부모님들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고교생활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서 고교 입학 전 선수학습은 어떻게 시키며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은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학시절과 고교시절은 학습의 강도나 생활방식 면에서 마치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다.
작년 3월 초순의 일이다. 3교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내려오는데 학생 하나가 "선생님-" 하고 나를 불러 세웠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새 교복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피부. 한눈에 보아도 때묻지 않은 신입생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 발걸음을 멈추고 최대한 친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나를 불렀니?"
그러자 그 학생은 생글생글 웃으며 나에게 다시 물었다.
"선생님, 목이 마른데 따끈한 보리차 좀 주세요."
난데없는 학생의 요구에 난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고 보니 3월 초순의 날씨였지만 아직도 밖은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허참 이렇게 난감할 수가! 아닌게아니라 학생의 말처럼 따끈한 보리차 한 잔만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은 그런 쌀쌀한 날씨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교내에는 따끈한 보리차는커녕 뜨거운 물도 나오는 곳이 거의 없었다. 나는 무척 난감해져서 그 학생에게 다시 물었다.
"신입생이구나? 그래,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보리차를 먹었니?"
그러자 그 학생은
"네, 중학교 때는 우리 담임선생님께서 항상 주전자에 보리차를 펄펄 끓여놓고 우릴 주셨어요."
학생의 말을 들어보니 전교생 수도 얼마 되지 않았고 학교도 아주 작고 아담해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격의 없이 서로 도우며 알콩달콩 지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어떤 곳인가. 우선 규모 면에서 중학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리포터가 근무하는 학교만 해도 전교생이 일 천명이 넘고 교사 수도 60명이 훌쩍 넘는다. 캠퍼스도 웬만한 전문대를 넘볼 정도로 방대하다. 아예 처음부터 아기자기한 가족적인 분위기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격차는 신입생의 말처럼 보리차와 수돗물처럼 다르고도 먼 것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중학생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겪는 충격과 당황되는 심정은 가히 짐작이 갈 것이다. 갑자기 어려워진 수업내용은 물론이요, 각종 입학사정관 활동과 수많은 교과서와 수행평가들, 그리고 엄격한 학생지도와 단체생활 등등. 이 중에서도 신입생들이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이 끝없이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이다. 새벽부터 등교해서 밤 10시까지 같은 자세, 같은 자리, 같은 과목을 같은 사람들과 공부해야하는 과정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거기에다 쉴 사이 없이 쏟아지는 시험과 무한경쟁 과제들 때문에 일부 나약한 신입생 중에는 이런 과중한 스트레스 때문에 수업시간에 바지에다 똥을 싸기도 한다.
작년에는 두 명의 신입생이 똥을 쌌는데 올해는 또 몇 명의 아이들이 똥을 싸게 될지 걱정이다. 똥싸는 학생들을 예방하려면 우선 학부모님들께서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잘 알고 이해를 해야 한다. 고등학교의 교육은 주로 지식계발과 인성함양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일반적인 인문계 고교에서는 지식교육을 매우 중시한다. 인성교육은 이미 가정에서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에서 인성교육까지 겸하면 오죽이나 좋겠는가 만은 현실은 너무 벅차고도 냉정하다. 인성만 좋은 학생을 뽑아주는 대학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지식과 인성 둘 다 쫓다가는 둘 다 놓치기 십상이다. 이것이 요즘 입시가 목전에 걸린 인문계 고등학교들의 현실이다.
그러나 학부모님들의 생각은 고등학교와는 사뭇 다른 것 같다. 갈수록 치열해져 가는 각박한 세태 속에서 내 자녀만큼은 건강한 몸과 지혜로운 생각, 올바른 양심을 지닌 완벽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키워내고 싶은 것이다. 그 심정을 리포터도 충분히 이해한다. 리포터 또한 자식을 키우는 부모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입생 학부모님들의 소망과 대한민국 고교현실은 보리차와 수돗물만큼이나 괴리가 크다. 언제쯤이면 신입생의 소원대로 학교에서 따뜻한 보리차를 마실 수 있을지. 아니 수업시간에 똥을 싸서 체육복으로 갈아 입혀야 하는 학생들이 줄어들지.
다가오는 2010년 새해에는 부디 우리 교육현실이 좀더 행복하고 즐거워지길 진심으로 소망한다.